나의 300SEL 이야기 (1989' MB W126 300SEL)

올드카를 좋아하는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아련한 유년시절 아버지가 몰던 가족용 자동차,
등교길 동네 어귀를 돌아나가는 적갈색 담벼락 앞에 서있던 검정색 스포츠카,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마련 했던 생애 첫차,
잡지책 모서리가 닳도록 넘겨보던 수 많은 드림카들..

꿈 많고, 감수성 충만했던 그 시절의 자동차를 현실로 만드려는 아저씨들의 노력은 전기차 시대를
맞닥뜨린 지금도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진행되고 있겠지요.


1996년에 출시된 기아자동차 엘란이 저에게는 그런 자동차입니다.
엘란의 영향력이 커서인지 언제부턴가 수동, 소형, 경량, 2인승, 오픈로드스터 등의 키워드가
저에겐 이상적인 자동차의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때문인지 그 굴레에 갖혀 범주에서 벗어나는 자동차들을 등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30년된 올드벤츠의 차키를 손에 넣었습니다.
비록 선호하는 자동차는 아니었지만 80년 중반부터 90년초 한반도에서 가장 고급승용차였다고 말할 수 있는 모델로 
한성자동차를 통해 정식수입 된 300SEL(W126)입니다.
익숙한 옛 벤츠의 모습이지만 변해버린 도로 위의 풍경 속에 꽤나 클래식한 모습으로 다가오더군요.
당시 막역한 지인의 차량이었는데 사정이 생겨 대리판매 해주려고 가져왔다가 몇번 타보고 저도모르게 빠져들고 있던 것입니다.

'분명 내 스타일이 아닌데 왜 끌리는거지?'

그동안 작고, 시끄럽고, 딱딱한..다분히 불편한 자동차만 타다가 경험해본 300SEL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착각인가 싶어서 준대형 하이브리드 차량을 운행중인 와이프를 동승시켜도 봤는데 반응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보, 이게 30년된 차 맞아?!"

세로로 길쭉한 로커암커버에 가지런히 노출된 6개의 하이텐션 코드가 매력적인 300SEL의 직렬6기통 엔진은
악셀반응과 엔진음이 정말 부드럽고 정숙했습니다.

특히 묵직한 초기기동에서 발휘되는 엔진의 음색은 300SEL을 더욱 특별한 차로 느껴지게 합니다.
광활하리만큼 넓은 엔진룸이 좌석으로부터 저만큼 멀리있고, 이중 격벽과 묵직한 흡음제 때문인가하고
후드를 열어보니 엔진 자체가 진동과 소음이 적더군요.


스트로크가 짧은 피스톤이 1-5-3-6-2-4 순으로 균등 폭발하며 2미터가 넘는 프로펠러 샤프트를 구동시킵니다.
아무래도 굼뜬 올드카의 초기 가속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촐랑대며 급출발을 해왔는지 참회의 시간을 갖게하더군요.
때문에 감속시에도 같은 박자로 차분해지고 이래저래 여유있는 매너운전이 자동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괜스레 93.1Mhz 클래식FM이라도 틀어놓고 바쁜 마음 추스리며 한결 여유를 되찾게 해주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렇긴해도 실용한계영역인 5700rpm까지 꾸준히 상승하는 출력특성과 고속에 유리한 자동 4단 기어비 세팅은
부족함이 없는 고속크루징을 가능케합니다.
당시 300SEL이 북미시장에서 성공한 이유를 이 대목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꿈꾸던 올드카의 범주에 없던 모델이지만 W126의 매력에 빠져있습니다.
앞으로도 관심과 애정을 끊지 않고 오래오래 보존해 갈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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