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Sachsa라는 마을로 가는 와인딩은 내가 독일와서 달려본 최고의 와인딩이었다.
R32로 산악로 형태의 와인딩을 즐기는 즐거움을 뒤로 하고 귀가하는 길, 쭉쭉 뻗은 아우토반은 단 몇초라도 빨리 집에 바려다 준다.

중간에 시가지 아우토반은 제한이 100km/h라서 좀 답답하지만 바로 앞에 있는 램프만 돌아 나가면 또다시 시원한 A2로 갈아타게 되고 R32의 쓰로틀을 맘껏 열어줄 수 있다.

앞에 가는 E60 5시리즈와 램프를 함께 달렸던 기억조차 희미할 정도로 존재감에 관심이 없었던 비머를 향해 눈길을 고정시킨 이유는 A2에 올라오자마자 풀가속을 때렸는데도 가뿐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서이다.

독일에서 대배기량 차량은 비율적으로 흔치 않다.
BMW 5시리즈 역시 가솔린은 523i이 주류이고 525d가 가장 많이 팔리는 모델이다.
배지가 없는 BMW는 출력이 200마력 전후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R32와 아우토반에서는 솔직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근데 R32를 따돌리면서 달아나는 이 차의 정체는 545i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6기통을 장착한 5시리즈는 확실히 아니었다.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갈 수는 있었지만 앞이 뚫려 함께 가속하는 상황에서는 100마력 이상의 출력차를 인정해야했다.

A39로 갈아타야 Wolfsburg로 향하게 되는데, 마침 정체모를 E60역시 램프에 편승한다.
늘 자신이 있는 이구간은 왼쪽으로 꺽어지는 살짝 오르막 코너가 아주 예술이다.

E60이 2차선으로 램프를 공략할 때 과감하게 1차선을 활용해 4단 140km/h우측 코너 공략하면서 추월 성공 곧바로 3단 시프트 다운 속도를 110km/h정도로 맞춰서 미세하게 조정하지 않으면 그대로 코너 밖으로 날라간다.

깨끗하게 라인을 그리며 좌측코너를 탈출하자마자 1등이지만 당연히 끝차선인 2차선으로 차선을 옮기고 살짝 오르막 정상을 바라보며 풀가속을 때린다.
E60이 코너를 빠져나온 시점에 나는 이미 3단 풀에서 4단으로 넘어와 한참을 가속한 상황이었다.

E60이 거리를 전혀 좁히지 못하는 것 같다가 어느순간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짐을 느끼고 있었고, 룸미러안에 E60을 담고 있는 것 자체가 더이상 불가능했다.

4단에서 5단으로 넘어가는 순간 210km/h정도에서 이미 E60은 R32에게 어머어마한 이산화탄소를 뿜어대며 최소 40km/h이상의 속도차로 질주한다.

추월당한 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했지만 속도계가 270km/h를 가르키는 R32의 자존심은 그 정체 모를 E60에 의해 완전히 구겨지고 폭스바겐의 홈그라운드인 Wolfsburg에서 당한 상처라 휴유증이 클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램프를 빠져야하는데, 희안하게도 E60도 함께 같은 출구를 타게 되었다.
번호판은 이동네가 아닌데, 희안하네 하면서 슬쩍 옆에 들이대보니 중년은 넘긴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엄지를 들어보이며 존경의 미소를 보내고 나서 앞서가는데 앞에 주유소가 보인다.
본능적으로 창문을 열고 주유소를 향해 손짓을 하자 이내 따라서 주유소로 들어왔다.

내리자마자 이름을 소개하고 즐거운 주행이었다.
엔진이 뭐냐고 묻자 550i란다.
젠장 공도에서 550i와 같은 차를 만날 확률은 M5를 만나는 확률만큼 낮다.

367마력 SMG를 장착한 이 녀석의 주인 아저씨는 자동차 시트를 개발 생산하는 회사의 고문이란다.
폭스바겐 투아렉의 뒷시트를 이 회사에서 공급하며, 전국을 다니는데, 일년에 8만킬로를 달리는 엄청난 로드맨이었다.

50은 훌쩍 넘었을 것 같은 아저씨의 운전솜씨도 예사롭지 않았지만 일년에 8만킬로를 운전하는 이분에게 550i는 더없이 좋은 운송수단이라는 차원에서 독일이 아니고서는 550i를 100% 즐길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R32를 가르키며, 자기가 태어나서 본 폭스바겐 중에서 가장 빠른 놈이라며 차가 순정이냐고 물었다.
엔지니어답게 자동차가 E60이 가진 하이테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언제 시간되면 사무실에 놀러와서 차나 한잔하자고 하는 제안은 빡센 일상에서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독일에서의 고속배틀은 1차로나 2차로만 사용하므로 긴장감이 덜하고 따라서 안전하다.
나보다 빠르면 무조건 비켜줘야하는 룰을 반드시 지켜야하며, 내가 빠르면 앞에 갈 수 있다.

아저씨들과의 찐한 배틀조차 너그럽게 허용하는 아우토반은 이제 나의 애인이나 다름없다.
-test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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