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제 차의 콕피트는 너무도 편안하고 행복한 곳입니다.
출근시마다 몸에 딱 맞는 버킷에 앉아서, 수온이 오를때까지 기다리며,
게이지, 부스트컨트롤러 등등 각종 계기에 기록된 수치들을 확인/리셋하고,
오디오를 틀면서 자세를 바로잡고 양 어깨를 조이는 벨트를 조이며..
오늘의 즐거운 출근을 생각하며 지하 주차장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평소와 같은 100-150영역대의 적당연비의 적절한 출근 주행..
행여나 앞이 열려 길게 비었을때 한번씩 걸어주는 풀부스트의 가속력..
시원한 블로우오프밸브의 파열음..
다가오는 전방 차량을 보며 타이밍을 재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충격없이 들어가는 힐앤토와 감속..차간유지..

이 차가 나를 지켜줄거라는 신뢰와,
나라면 이 차를 수족처럼 다룰수 있다는 자신감..

제게 있어 평소의 아수라는..
함께 힘을 합쳐 도로를 달려나가는 친구이자 동료..
폐쇄된 공간에서 자신에게 혼자 말할수 있는 저만의 공간..
말할 수 없는 제 행복이자 제게 주어진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성을 드러내며 움직일때의 이 녀석..
이 녀석이 진짜 만들어진 목적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

언제부턴지 전..  너무도 두렵습니다.

정식으로 핸들을 잡고 풀부스트로 크루징을 시작해야할때,
속도가 200km 가 넘어서고 언제부턴지 습관적으로 이를 악물기 시작합니다.
소위 '배틀'이라고 불리는 상황이거나, 친선이거나, '고속크루징'을 하고 나면..
항상 턱에 경련이 오고 이빨이 흔들거립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라는데 안도하며..


며칠 전, 어쩌다보니 고속크루징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은채, 차에게 계속 중얼거렸습니다..
'아수라, 나를 지켜다오. 나도 너를 지켜주겠다'

(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게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보통때..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가 그런 상황에서 아수라에게 하는 말은,
'힘으로 지는 건 용서할수 있지만, 배틀중 퍼지는 건 죽어도 용서못한다'
..라고 차에게 말하곤 했었고, 이 녀석은 제 기대에 부응해주듯,
다행히 지금까지 배틀상황에서 차가 퍼져본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만..)

다행히 무사히.. 주행을 마치고,
제가 어느새 옛날보다 잃을게 많아졌나..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진짜 제가 가장 열심히 달리던 시절에 비해서...
지금은.. 확실히 제 생활이 행복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행복을 되찾은 가정, 사회적 지위, 개발자로 복귀..
그리고 원한다면 여기서 한발 더딛어 높은곳을 바라볼수 있는 기회..
(물론 그 한발의 의미가 어떤것인지 아는 이상 내딛지 않겠지만요)

예전의 저는...
지금 여기서, 고속도로에서 죽어도 아무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고,
내 삶에 가치가 없으면 여기서 바로 죽여달라고 신께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몇년간 수많은 아수라장을 헤쳐 나왔으나..
지금 여기, 문득 제 스스로가 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약해 진걸까...?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 생각합니다.

그때는 '정말 두렵지 않아서' 달렸고,
지금은 '두려움을 참으며' 달리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두려움을 알게되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두렵다고 이 세계에서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문득 야밤에 차에서 뭔가를 가지러 갔다가,
주차장에서 12월 27일, 서울외각순환고속서킷의 개통을 기다리는 차를 보고..
스스로의 그림자를 본 기분이라.. 문득 센티해져 글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