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씩 제 카라이프를 테드에 글로 남기고 싶었지만
 
예전에는 나홀로 카라이프를 즐기고 있었고

뭔가 글을 쓰기에는 좀 허전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결혼도 아이도 있는 지금 추억을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용기를 내어봅니다.

어릴적 저의 시골집은 마당에서 도로까지 100m 정도의 비포장 길이 있었고

아버지께선 수동미션과 클러치의 작동방식을 어릴때 부터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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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과 같이 파란색 뉴포터 초장축 수동이었습니다

클러치패달 끝까지 발이 닿을 정도가 되었을 때
 
마당 안에서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전진 1~2단과 후진주행을 자주 해보곤 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면허를 따고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뉴포터를 가지고 배달도 하였고
 
가끔씩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의 이사도 돕기도 하였으며
 
친구들에게 나서서 태워주기도 했습니다.

뉴포터는 미터기가 62만km에서 이미 고장이 난 상태였습니다. 

시속 60Km를 넘어가면 두 사람의 대화도 언성을 높혀야 할 만큼 진동과 소음이 심했기에

지금 생각하면 창피할법도 하지만 그때에는 짐차를 가지고 올수 있는 사람이 흔하지 않아서

인기가 참 좋았습니다.

누가 원룸이사를 하거나 특히 대학교 축제때 필요한 기물을 옮기는데 요긴하게 쓰였던 것 같습니다. 

넓은 캠퍼스 안에서 축제에 쓸 무겁고 커다란 연구실 책상을 축제장소까지 옮기려면 정말 힘든데

승용차 지붕에 책상을 거꾸로 얹은 다음에 테이프로 고정하고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단디 붙잡고 가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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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렇게

포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이런 짐차를 구할 수 없는 학과에서는 6명이서 낑낑대며
 
그 무거운 나무 책상을 머리에 이고 가는데
 
그 부러움의 시선들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하하하

지금도 지인들의 기억속에 제가 태워준 덜컹거리는 포터가 많이 각인되어 있더군요.

시간이 지나 친구들은 군입대를 하게 되고 저는 고민을 하다가 

병역특례병으로 공장에서 군대체복무를 3년가량 하게 됩니다.

쉬는날 없는 3교대근무에 비같이 쏟아지는 땀과 동시에 기계의 열기에 바로 말라 버리는...

코를 풀면 먼지가 매일매일 시퍼렇게 나오는 정말이지 개같이 힘든 곳이었는데

그나마 퇴근 후에는 일반인 같이 자유롭게 다닐수 있으니 버틸수 있었습니다.
 
월급도 그당시에 130정도 받았으니 나름 괜찮았지요.

이때 처음으로 제 차를 사게 되는데요. 

아버지와 함께 중고차 상사에 방문한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일단 미리 점지해 두신 아버지의 강력한 후보가 있었습니다.

첫 차는 이래야 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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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륜구동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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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속도로 순찰차량으로 은퇴한 무려 80만Km 달린 '매그너스 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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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쎄끈하게 생긴 기아 '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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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부식수리, 도색을 마친 1997 아반떼, 수동


그리고 저의 후보 '아반떼'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후보들은 100만원 언저리에 형성되어 있었고

아반떼는 174만원의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저는 아반떼에 시동을 걸고 보닛을 열고 엔진소리를 먼저 들어보는데 아반떼의 엔진음이

뭔가 안정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직감적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프린스를 사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반대하고 조르고 졸라 아반떼를 구입했고
 
중고차단지 내에서 시운전을 하며 포터보다 훨신 부드러운 클러치에 감탄을 하며

적응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은 정말이지 벅차오르고 긴장도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새차를 구입하더라도 그런 감동은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아반떼를 지금까지 15년동안 타고 있지만 차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떠나서 

내가 타는 차량에 많은 의미가 부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기술과 역사를 생각한다면 수입차들에 비해 모자람이 있지만

이 아반떼에는 현대자동차의 첫 엔진이라고 하는 '알파엔진'이 있다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자동차 고 정주영회장이 자동차산업 만큼은 지금 따라가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83년 엔진개발을 위한 연구소를 계획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에게 돈을 주고 엔진기술을 받아쓰고 있었고

그들이 엔진기술을 팔지 않겠다고 한다면 현대는 자동차생산을 중단할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자체적으로 엔진개발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미쓰비시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현대자동차 연구개발 본부장조차 엔진개발을 반대하며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1980년에 포니의 가솔린 엔진을 디젤엔진으로 개조하여 

아우토반에서 시험까지 마쳤지만 계획이 취소된 실패의 경험이 있었기에 

독자엔진개발에 더더욱 부정적일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쓰비시의 '구보회장'이 두번이나 고 정주영회장을 찾아와서 

"엔진개발을 취소한다면 엔진로열티를 절반으로 깎아주겠다"라며 어마어마한 제안까지 하였지만
 
고 정주영회장은 이 말을 듣고 오히려 '알파엔진 개발'에 전폭적인 지지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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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회장과 정주영회장


영국의 '리카르도'라는 회사와 기술협약을 맺고 차가운 대접속에 설계기술을 배웠고

도대체 왜 엔진을 만드려고 하느냐는 말을 들으며 부품회사를 설득해야만 했고

1986년부터 내구성 테스트를 하며 엔진을 1주일에 1대씩 20대 이상 깨먹기 시작하며 고비가 옵니다.

그당시 연구용 엔진 1대에 2000만원 이상하는 비싼 가격이었으니...

1991년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100대의 엔진을 깨먹었지만

결국은 현대의 첫 자체엔진 '알파엔진'개발에 성공하였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지요. 

개발에 성공하고 미쓰비시의 '구보회장'이 다시 다녀갔고

'구보회장'은 일본의 미쓰비시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두 정신차리지 않으면 10년 뒤엔 현대자동차에 기술을 배우러 다닐지도 모른다"고...

이 예언이 2005년 미쓰비시 교토엔진공장에 '세타엔진 전용공장'을 완공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이 '알파엔진'과 '세타엔진'은 현대자동차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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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가 결혼하고 데려온 차량이 바로 '세타2엔진'이 들어가 있는 '로체 이노베이션 2.4L'입니다.

우연찮게 이렇게 된 것인데 아반떼, 로체 이 두 차량이 390,000Km, 320,000Km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엔진이상은 한번도 없었고

별 이상없이 잘 굴러다니고 있고 애정이 더욱 더 생기는 것은  국산엔진의 기술과 탄생의 자부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6살인 제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차가 다행히 제 아반떼라서 다행이긴 한데요.

얼마전 지나가던 빨간색 컨버터블이 뭐냐고 해서 BMW라고 했더니

지금은 BMW한대 사자고 자꾸 졸라서 조금은 난감하네요. 하하

저의 앞으로의 카라이프가 어떻게 흘러갈지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분수에 맞게끔 여유있게 관리를 하면서 즐기는 것이 만족도가 높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회원님들의 안전한 카라이프와 건강을 기원하면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