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랫동안 자동차 글을 써오고 있는 류청희입니다. 테드에는 거의 백만 년 만에 글을 쓰는 것 같네요.

글의 시대에서 영상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탓에 어려움을 겪고는 있습니다만, 여전히 글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만들며 근근이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좀 별난(?) 차를 입양한 김에 생존 신고 겸 몇 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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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들인 차는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하지만 평범하지도 않은 2003년형 쌍용 체어맨 600S입니다. 외환위기로 쌍용이 대우에 넘어갔다가 다시 독자 경영체제로 복귀하고 2003년 하반기에 페이스리프트한 뉴 체어맨이 나오기 직전에 출고된 1세대 체어맨 마지막 버전입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는 이동희 자동차 칼럼니스트께서 작년에 사서 한동안 쓰던 찬데요. 이동희 칼럼니스트가 인수한 직후에 유튜브 한상기 오토프레스 채널에 출연하기도 했던 바로 그 차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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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올해 상반기쯤 까지만 해도 이 차를 넘겨 받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사정상 지난 3월에 5년 넘게 타던 2017년형 쉐보레 스파크를 팔고 차 없이 지내다가 지인의 배려로 1999년형 대우 마티즈 디아트를 빌려 타고 있었죠. 하지만 이래저래 타인의 차를 빌려탄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생산량 자체도 많지 않은데 남아 있는 차는 더더욱 없는 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 많이 조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추석 전후로는 발로 쓸 값싸고 작은 차라도 하나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추석 지나고 나서야 난생 처음 20세기의 국산 슈퍼 울트라 하이퍼 럭셔리 카의 주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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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회원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쌍용 체어맨은 당대 국산차 가운데 많은 영역에서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은 차였죠. 태생이 메르세데스-벤츠기도 했지만 중형급이던 W124를 대형급으로 키우고 로컬라이징을 통해 뒷좌석 중심 고급차를 만들었으니까요.

실내 디자인 자체는 은은한 곡선을 많이 넣어 투박한 W124보다는 낫지만 고급차는커녕 승용차를 제대로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던 쌍용의 한계도 느껴집니다. 물론 당시 국산차 기준으로는 훌륭했고, 지금 봐도 썩 질리는 모습은 아니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그럭저럭 만족스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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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1세대 체어맨의 뻘건 빛이 진한 장미무늬 프린트 가짜 우드 그레인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그래서 어떻게 하면 천연 원목 베니어를 입힐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검은색 가죽 내장재와 더불어 차의 분위기를 호화롭게 만드는 데 한몫 합니다. 극초기 모델에는 없었던 스티어링 휠 우드 그레인까지 있어 화려함이 극을 달하는 모습입니다.

출고 후 20년이 흘렀고 누적 주행거리가 19만 km를 넘은 만큼 전체적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구석구석 자잘하게 부서진 곳이나 부품이 떨어진 곳이 있고, 모든 기능이 100% 정상 동작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일상적으로(!) 쓰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수준이고, 이전 차주가 차를 어떻게 수리하고 관리했는지 알기 때문에 안심하고 샀습니다. 원래 중고차라는 게 고치고 손질하며 타는 게 맛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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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M104 220마력 직렬 6기통 3.2L 엔진과 5단 자동변속기의 상태가 나이를 감안해도 꽤 괜찮은 상태입니다. 시동 걸 때 묵직한 크랭킹 후 화끈한 시동음을 내는 것도 나름 매력이고요. 진득하게 예열을 하고 나면 가볍고 부드럽게 회전수가 올라가며 힘을 내는 느낌이 좋습니다. 고급차 개념으로 만든 덕분에 실내가 아주 조용할 것 같지만 실내로 들어오는 소리에서 엔진이 내는 소리의 비중이 제법 큰 편입니다. 주관적으로는 한껏 진동 소음을 줄여놓고 엔진 소리나 배기음을 목표치에 맞춰 필터링하는 요즘 럭셔리 차들보다는 그런 느낌이 더 좋습니다. 변속기도 주행 조건이나 가속 정도에 따라 약간씩 움찔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는 해도 전반적으로는 변속이 매끄럽고 자연스럽습니다. 계단식 게이트로 레버를 움직이며 한 단씩 내리고 올릴 때에도 그렇고요.

뒷좌석 탑승자의 안락함에 초점을 맞춰 모든 부분을 조율한 차답게, 주행과 관련된 모든 장치는 다 부드럽고 매끄럽게 움직입니다. 유압식 파워 스티어링을 어떻게 이렇게 조율했을까 싶은 스티어링 휠도 그렇고, 반응이 묵직한 액셀러레이터 페달도 그렇습니다. 특히 브레이크 페달 느낌은 인수하고도 제법 시간이 흐른 요즘에서야 조금씩 익숙해지는 정도입니다. 반응이 무척 둔하고 반발력이 제법 큰 편인데, 신기하게도 밟는 깊이만큼 고르게 속도를 줄이기 때문에 차의 움직임을 조절하기는 좋습니다. 사실 체어맨은 세대별로 모두 몰아본 바 있어서 알고는 있었죠. 전에 체어맨이 '브레이크가 밀린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일반적인 브레이크 밀림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다른 기계적 부분은 상태가 괜찮지만 서스펜션은 손질할 필요가 있습니다. ECS 경고등이 들어온 상태인데,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지 조금 고민이 되긴 합니다만 그 역시 일상에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물론 차 나이를 고려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비슷한 시기에 나온 국산 동급 고급차들과는 달리 차분하고 묵직하게 조율한 느낌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체어맨 승차감이 다른 동급 차들에 비해 단단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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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어맨의 차폭은 당시로서는 넓은 편이었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소형 SUV 중에서도 덩치 큰 르노코리아 XM3이나 중소형 세단인 현대 아반떼와 같습니다. 형식상으로는 5인승이지만 뒷좌석에 두 명이 편안히 앉을 수 있는 개념으로 만든 차라서, 원래 의도대로라면 넉넉하지도, 답답하지도 않습니다. 앞좌석은 쿠션의 탄력이 조금 단단한 편인데, 쿠션 자체의 두께가 넉넉한 편이고 좌석 자체도 넓어서 앉기엔 편합니다. 앉는 부분과 등받이의 길이가 모두 짧은 편이라는 점과 높이를 최대한 낮춰도 약간 높다는 점이 조금 아쉬울 뿐이죠. 차 나이에 비하면 좌석 표면 가죽 상태도 나쁘지 않아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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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좌석은 앞좌석보다는 쿠션이 훨씬 더 부드럽고 푹신합니다. 헤드레스트도 곡면 처리되어 있고 높낮이도 조절할 수 있어, 머리를 기대고 누운 듯이 앉기 좋습니다. 물론 등받이 자체의 길이는 앞좌석처럼 짧은 편입니다. 표준 체형인 분들은 괜찮을 듯하네요. 지금 기준으로는 뒷좌석 편의장비가 별볼일 없는 수준이지만, 당시 고급차들 수준은 대부분 고만고만 했습니다. 앉는 부분이 슬라이딩되는 기능이나 열선, 옆과 뒤 유리에 블라인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급차라 자랑할 수 있는 시절이었죠. 그런 기능들 모두 정상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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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받이에 달린 접이식 팔걸이에는 좌우 좌석 슬라이딩 기능은 물론 동반석 조절 기능 스위치도 달려 있습니다. 팔걸이 뚜껑을 열면 외부 오디오/비디오 입력용 RCA 단자와 이어폰 연결 소켓을 비롯한 AV 시스템 조절 기능도 달려 있고요. 모니터가 대시보드 아래 센터 페시아에 달려있는 것이 유일하다는 점이 에러긴 한데, 어차피 지금은 쓸 일이 없으니 문제는 아닙니다. 트렁크에는 12 CD 체인저가 들어 있는데, 놀랍게도 구운 CD도 인식합니다. 2003년형 차니까 그 정도는 당연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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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작은 차 좋아하는 저로서는 사실 여러 면에서 이례적인 선택이긴 합니다. 쌍용에게 체어맨이 그랬듯, 저에게도 여러 면에서 '역대급'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찹니다. 예를 들자면

- 역대 최초로 구매한 쌍용 브랜드 차
- 역대 최초로 구매한 배기량 2,000cc 이상 차
- 역대 최초로 구매한 직렬 6기통 차
- 역대 최초로 구매한 최고출력 200마력 이상 차
- 역대 최초로 구매한 자동변속기 차
- 역대 최초로 구매한 길이 5m 이상 차
- 역대 최초로 구매한 너비 1.8m 이상 차
- 역대 최초로 구매한 휠베이스 2.8m 이상 차
- 역대 최초로 구매한 20년 이상 된 차

등이 있겠네요. 당장 6년 남짓 경차만 타다가 길이 5m가 넘는 차를 몰려니 그것도 조심스럽고요. 짧기는 해도 거의 매일 통근에 쓰려니 유지비도 슬슬 걱정이 되긴 합니다. 그래도 인수하기 전에 가득 찼던 연료탱크가 그간 450km 넘게 달렸는 데도 아직 연료경고등이 들어올 만큼 비지 않았으니, 엔진은 꽤 성실하고 건강하게 제 일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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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이 차를 얼마나 타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타인에게 넘기든 폐차를 하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갖고 있는 동안 만큼은 곱게 타고 잘 관리하며 좋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애써보려고 합니다. 물론... 지난 반 년 남짓 20년 넘은 차를 몰면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가 오래 된 차를 보살피고 가꾸면서 타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겁니다. 전에도 오래된 중고차를 사서 탄 적이 몇 번 있었지만 20년 넘은 차들은 아니었거든요. 어쨌든 나이 많은 차를 타려면 시간이 많거나, 돈이 많거나, 시간과 돈이 많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적으로는 그런 형편이 아니어서 걱정은 됩니다만, 늘 그렇듯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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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차들을 좋아는 하면서도 막상 같이 살아갈 일은 없었는데, 이번 체어맨 입양으로 좋든 싫든 그런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또다른 배움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올드카 라이프 선배들의 격려와 조언 기대해 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