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첫 차는 76년식 폭스바겐 비틀이었습니다.   제가 넷상에서 쓰고 있는 닉네임인 풍딩이는 이 차에서부터 따오게 되었습니다.   운전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운전보다는 자동차라는 그 자체에 관심이 더 컸기 때문에 당시 젊은이들의 로망이던 스쿠프나 르망 레이서보다는 어릴때부터 관심있던 비틀이 더 좋았습니다.  비틀은 성능이라는 측면에서는 참 보잘것 없는 차였죠.   출력은 90년대초 당시 1.5리터 차들의 반정도였고 무게는 살짝 가벼운 정도였으니 동력성능이 보잘것 없었음은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게다가 제동성능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4륜 드럼 브레이크 방식이라 초반에 잡아주는 반응은 좋았어도 브레이킹을 길게 끌면 쉽게 과열되어 곧 페이드 현상이 나타나곤 했지요. 가볍고 무게중심이 낮으므로 핸들링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지만 전반적인 성능에 있어서는 20년전 차들과 비교해도 현저히 뒤떨어지는 차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차로 다른 차들과 비슷하게 달리려면 다른 차들이 보통으로 달릴때 저는 거의 전력질주 하다시피 해야 했으며 교통흐름, 관성등을 잘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습니다.  성능이 떨어지는 차로는 남들에게 민폐끼치지 않고 달리기 위해서라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운전을 해야 했다고나 할까요?.  자연스럽게 시선을 멀리두고 다른 차들의 움직임을 좀 더 분주하게 관찰하면서 예측과 판단을 빨리 내리고 움직이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제 발이 되어준 차는 지프 랭글러였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새 차로 구입한 유일한 녀석 되겠습니다.  원래는 픽업트럭을 경험해보고 싶었으나 아바마마께서 용달차는 안된다고 하시며 아큐라 인테그라라는 차가 좋다던데 그걸로 하라고 하셨었죠.    이차 저차 시승해보니 정말 아큐라 인테그라가 참 좋은 차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픽업과 인테그라의 중간쯤에서 고르다 갑자기 랭글러가 떠오르더군요,  맥가이버가 타던 차라는 것도 없지는 않았고 강인하고 간결한 디자인도 정말 마음에 들었던데다 4륜구동차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랭글러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제 랭글러는 95년식으로 사각 헤드라이트를 단 마지막 해 모델이었습니다.  생산이 끝나던 무렵이라 딜러에 6기통 신차 재고가 없어서 4기통으로 사게 되었죠.  어쩌면 6기통 재고가 있었다 해도 가격때문에 4기통으로 갔을지 모릅니다만...
엔진 출력은 123마력으로 컴팩트한 차체에는 그리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으나 넉넉하다고 할 수도 없었죠.   물론 비틀보다는 나았고 6기통보다 앞부분이 가벼워서 약간은 가뿐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험로주행을 고려한 서스펜션은 4륜 리프스프링에 일체식 차축으로 요즘 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성이었습니다.  짧은 휠베이스에 무게중심도 높고 운전석 위치도 높아서 차가 조금만 흔들려도 감각적으로는 그 흔들림이 훨씬 크게 느껴졌습니다.   따라서 운전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차가 꽤 거칠게 움직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조작을 부드럽게 하도록 저를 다듬어주었습니다.   게다가 하중이동으로 인한 조향특성의 변화를 아주 잘 보여주는 차이기도 했지요.  프리웨이의 굽은 구간에서는 스티어링을 고정한 채 가속페달을 밟거나 놓는 것만으로도 차선 한두개쯤은 쉽게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불안정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제게는 이런 특성이 운전을 부드럽게 가다듬어주는 쪽으로 작용했습니다.  익숙해지고 나니 코너가 많은 산길을 이런 차로 달리는 것도 꽤 재미있더군요.  스포츠카와는 다른 또 다른 즐거움으로 연속코너에서도 리듬을 잘 타면 의외로 꽤 민첩하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코너의 곡률을 파악하여 중간에 쓸데없이 스티어링을 수정하지 않도록 한번에 감았다 한번에 풀면서 빠져나오는 연습을 하는데에 있어서 하중 이동이 쉬운 이 차의 특성이 많은 도움을 주었고 코너가 이어지는 산길에서도 그런 리듬을 이어가면 좌우로 적당한 롤각을 유지한 채 빠져나갈 수 있었죠.  반경이 조금 변하는 코너에서는 스티어링보다는 가속페달로 충분히 라인을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랭글러도 꽤 마음에 드는 차였는데 제가 그만 알파 바이러스에 걸리는 바람에 제 손에는 1년 조금 넘게 머물고 알파로메오 GTV에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알파로메오 GTV는 예전에 사진으로 보았었는데 그때는 그렇게까지 감흥이 크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포모나에서 열린 자동차 스왑밋에서 실물을 보고 나서는 정말 확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정말 홀렸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이 멀쩡한 랭글러를 팔고 73년식 알파로메오를 질러버리고 만 거였죠.  정상적인 정신상태의 유학생이 할 짓은 아니었습니다.  랭글러의 감가상각이 적었기 때문에 알파로메오와 함께 86년식 재규어 XJ6까지 입양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죠.  어떻게 본다면 이태리제 스포츠카와 영국산 럭셔리카를 동시에 소유한 호화 유학생활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연식은 짧아도 주행거리가 길었던 랭글러를 판 돈으로 이 두대를 다 커버할 수 있었습니다.  알파로메오 GTV가 저때만 해도 그리 비싸지 않았거든요.  지금 제가 그때의 상태대로 그 차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쯤 3~4배 정도는 값이 올랐을겁니다. 

 

재규어 XJ6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격이 낮은 중고차에 머물러 있습니다만 사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세단이 바로 이 모델이기도 합니다.  드림카중에 재규어 E-타입도 포함되어 있는데 사실 꿩대신 닭이라는 측면도 있었고 어찌되었건 클래식한 느낌의 재규어를 한번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재규어는 부드러운 승차감의 세단인데다 오토매틱이어서 특별히 운전을 다듬어준 차는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알파로메오는 달랐죠.  차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알파로메오 클럽에 가입함으로써 알게된 분들을 통해 배운 점이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제가 트랙주행을 가끔이나마 가기 시작한 것이 이 차와 인연을 맺으면서부터였지요.   알파로메오 클럽은 드라이빙 스쿨, 타임 트라이얼, 레이스 등 다양한 트랙 이벤트를 열고 있습니다.  

 

 

예전에 미주 한인 방송인 TVK에서 파일럿으로 찍었던 영상입니다. 초반 약간은 넘기시고 보시면 됩니다.

 

 

알파로메오 클럽 드라이빙 스쿨은 주변에서 운전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종종 권하는 곳이고 저도 몇년에 한번씩은 기초를 다시금 점검한다는 의미에서 초급이나 중급 과정을 수강하곤 합니다.  알파로메오는 차 자체로서도 운전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보다는 커뮤니티 속에서 제가 배운게 더 많았던 차였습니다.  파워 스티어링이 없어 상당히 무겁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확실한 피드백을 전해주는 스티어링, 무거운 기어 트레인의 회전관성을 억제하기엔 좀 부족한 용량의 싱크로메시 때문에 항상 제대로 된 더블클러치를 써야하는 변속기, 밟는 힘에 정확히 비례하여 제동력을 이끌어내는 브레이크 등은 전자장비라는 것이 전혀 없이 완전히 기계로만 이루어진 스포츠카를 모는 즐거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달리는 즐거움과 듣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을 모두 만족시켜준 차였죠.  이 차를 통해 스포츠카를 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즐겁게, 때때로 과감하게 달릴 수 있는 성격과 능력을 가진 작은 쿠페는 당시 제 생활에서 실용성의 측면에서 보아도 별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재규어 XJ6는 그냥 디자인과 호기심으로 산 차였고 제 운전의 변화에는 별다른 영향을 준 차는 아니었습니다. 

알파로메오와 재규어는 IMF의 영향으로 제 손에서 떠나보내야 했고 그 뒤를 이은 것은 또다시 비틀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탔던 비틀 이후 미국에서 74년식 수퍼비틀을 잠깐 가지고 있던 적이 있었는데 알파로메오 이후에 산 차는 다시 77년식 일반형 비틀이었습니다.   수퍼비틀과 일반형 비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앞 서스펜션이었죠.  수퍼비틀은 맥퍼슨 스트럿, 일반형 비틀은 트레일링 링크 방식의 앞 서스펜션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비틀을 다시 타면서 제일 먼저 손을 본 부분은 브레이크였습니다.   디스크 브레이크 볼트온 키트를 사서 직접 장착을 한 이후 문제가 될 만큼의 페이드 현상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동력성능쪽으로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차였으나 통학이나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이차로도 종종 고갯길 드라이브를 갔었는데 오르막에서는 출력이 낮은 차의 비애가 그대로 느껴지기는 했어도 내리막길에서는 가벼운 차체가 주는 경쾌함 덕분에 꽤 신나게 달릴 수 있었죠.  뒤쪽으로 무게가 쏠린 차라서 코너에 들어가기 꾸욱 하고 제동을 걸어 앞바퀴에 하중을 실어준 뒤 진입하지 않으면 자칫 심한 언더스티어로 위험할 수가 있고 또 중속 이상의 코너에서 진입속도가 빠르면 무거운 뒤쪽이 휙 빠져나가는 때도 있어서 그때그때의 주행상황과 속도에 따라 큰 폭으로 변하는 언더스티어와 오버스티어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77년식 비틀은 도난으로 제 손을 떠났고 그 뒤를 이은 차는 69년식 비틀입니다.   나중에 포르쉐 911을 사게 된다면 비틀을 타면서 체득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일상용으로 타고 있는 BMW E34 530i는 운전실력을 키워주는 차는 아닌듯 하고 오히려 운전실력의 정체 내지는 퇴보에 일조하는 차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차가 크고 전반적으로 소프트한 편이기 때문에 (스프링과 댐퍼를 바꿨지만 부싱류는 여전히 좀 부드러운 느낌입니다) 조금 거친 조작도 차가 흡수를 해버리고 실제 주행거동으로 나타내지를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은근히 일부 조작이 거칠어져도 제 스스로 잘 느끼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가끔 회사의 업무용 차인 제네시스 쿠페를 타보면 평소의 제 운전중 조금 거칠어진 부분이 여기저기서 느껴지곤 합니다.    빨리 비틀을 다시 손봐서 수시로 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생각만큼 여유가 나지를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