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내려가기에 앞서..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써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늘 그래왔듯이 침묵해야만 하는가..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손가락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ㅎㅎ
자체적인 판단하에, 보안 상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만 적어야겠습니다.
사진에서도 가급적 번호나 얼굴, 비표 등은 가렸음을 양해바랍니다.

(사실 고민할 정도면 쓰지 않는 것이 정답이긴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해마다 정기적으로 의전행사 운전을 하게 되는 것은 2개입니다.
물론 비정기적인 것을 포함하면 평균을 따지기 힘듭니다.
그 때 그 때 연락오는 것을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라..


얼마 전에 독일 주재 대사관에서 행사 운전 요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습니다.
사전 인터뷰 및 미팅까지 있는 걸 보니 느낌이 딱 왔습니다.
'아.. 그 분이 움직이시는구나..'

 

옷과 넥타이, 구두마저 고르는데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생각보다 날이 더울 것 같은데 여름 정장을 입자니 너무 밝은 회색이고..
어쩔 수 없이 춘추복인 짙은 색상의 정장과 검은색 구두, 다소 차분하고

깔끔한 셔츠와 넥타이를 골라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같이 운전하게 될 친구들을 보니, 미안하지만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신원이 확실한 사람 위주로 골랐는지 제가 생각하던 베스트 멤버들이 별로 없습니다.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서 오지 않는 사람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납니다.


아니나 다를까.. 본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주차장에서 차를 긁는 사람,
차를 빼내지 못해 쩔쩔 매는 사람.. 행사 관리를 주도하시는 분이 급기야 언성을 높이십니다.

가관입니다. 다른 건 필요없고 제발 내 차만 받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차들과 멀찌감치 떨어뜨려 제 차를 세워놓고,
그래도 혹시나 싶어 오른쪽 면을 기둥이나 벽 쪽에 세워놓습니다
(차량의 오른편에서 사용관이 타기 때문에 그나마 오른쪽이 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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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한 대 밖에 없는 차량도 유사시를 대비해서 하나 있더군요. 신기했습니다 ㅎㅎ

 


대기업 쪽의 행사를 하면 간단한 차량 관리 용품을 구입한 후에 영수증 처리를 하지만
이건 뭐 국가를 상대로 한 거라 괜한 '혈세' 얘기가 나올까봐 그냥 제 차에서
자동차 용품을 꺼내서 썼습니다. 타이어 광택제부터 한국에서 들고 온 먼지 털이개까지..
중간에 몇 사람들이 좀 빌려달라며 손을 내밀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물품들을 건네줬더라면 빈 통이 되어서 제 손에 돌아올테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과 뭔가 공유한다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죠.
물론 몇 번 같이 일하던 베스트 멤버들과는 뒤에서 몰래 공유하긴 했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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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이, 제 차는 창고 역할로 썼습니다. ㅎㅎ

불현듯, 정확한 각도로 야간 시야를 밝혀주는 저 헤드램프가 부럽더군요.. 제 차는 백열전구 수준이라..

 

 

행사 당일까지 선탑자(군대용어인가요?) 및 경로가 하달되지 않습니다.
미치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용관을 알아야 그 사람의 취향에 맞게
나름 준비를 하고, 이동 경로를 알아야 Plan B, Plan C를 계획해 두는데
'보안' 이라는 두 글자 앞에 다 가려져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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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으시면 안됩니다 (경호원 놀이)

 


아..
공항 영접 때문에 이동하려는데 영화에서나 보던 투명색

이어 마이크폰을 장착하신 분들이 제 차에 탑니다. 설마..


직감이 들어맞았습니다. 그 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저에게 내려진 지시는 '앞 차를 놓치면 안된다, 바짝 붙어야 한다' 등의
몇 가지 중요 지시 사항이 있었습니다.
제 경험상 습득한 바로는 더 많은 것들이 있지만 사정상 적을수는 없고..
예전에 적었던 '의전운전 ABC'라는 글에 적었던 내용은 기본 바탕이 되는 부분입니다.
ex) 후진이 아닌, 유턴 방식으로 출입구 앞에 다시 정렬해 놓는다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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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를 맡고 있는 분들에게 안전벨트는 애석하게도 불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초를 다투는 직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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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을 때 불편해 하시는 것 같아서, 나중에는 벨트를 의자 밖으로 빼드렸죠.. ^^

 


사전에 운전자들과 경로를 맞추지 못한 까닭에 불안한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사이드미러로 뒤를 보니 20 여 대에 가까운 차량이 제 뒤를 따라옵니다.
맙.소.사.... 길을 잘못 들면 죽겠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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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만 얼추 저 정도였으니.. 밴까지 합치면 뭐..

 

 

일반적인 의전 운전보다 한 가지 편한 점은 시시각각의 정보가 경호원을 통해 바로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차를 정위치 시키는 게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인데
갑자기 경호원 분들이 분주해지면 저는 재빨리 차에 앉아 시동 열쇠를 돌릴 준비만 하면 됩니다. ^^


흔히들 싸이카라고 하는 오토바이 경호대와 베를린 현지 경찰이 즐비하게
눈 앞에 들어옵니다. 제 앞에 달리는 그 독일 운전자(소속은 경찰)는
저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합니다. 아니, 명령 수준입니다 ㅎㅎ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 따라와라. 네가 무리에서 벗어나면 즉시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
등등의 지시를 하지만 약간 긴장한 제 얼굴에 뭔가 포기한 듯한 표정입니다.


공항 영접이 시작되고 드디어 행렬이 시작됩니다.
대기하는 중에도 저는 차에서 절대 내리면 안 되고(만약을 위해)
차량이 정차하는 중에는 가급적 라이트와 시동을 끕니다(시야 방해와 소음 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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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다니요.. ㅎㅎ (메르체데스 측에 알아봤더니, 저 국기 봉이 약 50-60만원 한다더군요)

 

 

커브에서도 기가 막히게 줄을 맞춰서 돌아나가는 오토바이를 보며
감탄할 뿐이지만 사실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경로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일반 도로를 달릴 때에는 언제 어디서 무엇이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일자로 반듯하게 달리지 않습니다. 1호차에 대한 시야 확보와 위험 요소의 즉각 대비가
우선이기 때문에 지그재그 정신 없습니다. 앞 차 운전자가 제게 말해주던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제서야 이해가 됩니다.


경찰의 통제를 따르지 않으면 공무집행 방해죄로

현장에서 면허증을 압수당할 수도 있다는군요 (적어도 독일에서는)..

살다보니 신호등을 전혀 개의치 않고 달리는 경우가 다 생깁니다.
한 번은 제 옆에 계신 분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 '실수로'
우회전 깜빡이를 넣은 것에 굉장히 무안해졌습니다. ㅋ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자동으로 3번이 깜빡거리니 죽겠더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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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만 없으면, 왠지 살벌한 독일 영화가 생각나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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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좌석의 위치를 레드카펫과 맞추려는 운전자의 노력이 가상했습니다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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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에 차가 뜨거워지자 이내 곧 그림자로 옮겨버리더군요 (제 자리는 없는건가요? 에잇..)

 


경호처에서 얻은 작은 뱃지를 가슴에 부착하니 왠지 모를 자부심과 용기가 생깁니다 ㅎㅎ

실질적으로 경호과장인 듯한 분이 명함까지 주시며
'한국에 오면 연락하세요. 술 한 잔 사게' 라고 하셨지만
왠지 썩 내키질 않습니다 ㅎㅎ 청와대에 연락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ㅋ
(사실 내면적으로 굉장히 따뜻한 분이시지만 업무 중에는 포스가 대단합니다)


실전에서 경호업무를 담당하시는 분들은 정권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신 모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저희가 출발 대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접근하는 차에
몸을 던지시며 막는 모습을 보며 감탄을 자아냈죠.
'나는 자존심을 버리며 항상 이런 일을 하지만, 저 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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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운전병 출신이지만.. 대한민국 공군 1호기는 처음 봤습니다.

 

 

세세한 상황이나 몸소 얻은 정보들은 두뇌 속에 집어놓고 더 이상의 글로 적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ㅎㅎ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그 곳의 정보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나름의 업무(?)후에도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계약 상의 도리이자  현실인 것 같습니다.


영화 bourne 시리즈를 너무 좋아하는 저로써는
운전하는 내내 bourne supremacy 의 OST가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제 옆에 앉아계신 분들이 마치 제이슨 본처럼 느껴지고 (얼굴이 싱크로되진 않습니다만)..

 

군 시절부터 무의식중에 세뇌되었던 것 중 하나가
'위급 상황에서 네가 빠져나갈 길을 찾고 무조건 재빨리 상황을 피해라'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유난히 두리번거리며 비상구를 찾거나 운전 중에는 다른 길을

염두에 두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때에는 조금 비굴하게 보이는 상황도 있긴 하지만
뭐든 일이 터지는 것보다 잠시 쪽팔리더라도 상황을 모면하는 게 낫다고 위안삼아야죠 뭐..

 

 


다른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유난히 차량 탑승자들과 개인적인 대화가 없었던 편이었습니다.

사실 이동 중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죠.
신원 조회를 하면서 저를 좀 털어보셨는지 일부러 그 차량에 배치시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승진씨는 이런 일이 거의 직업이라 할 수 있겠네요'라는 어느 분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했고..


게다가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업무가 종료되자 제 앞을 달리던 그 독일 운전자는 악수를 청하며
'즐거운 시간이었다. 기회가 되면 또 보자'며 웃었습니다.
(사실 그 운전자는 기타 행사 장소에서 종종 보긴 했습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해서 그렇지 ㅎㅎ)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한숨을 푸욱 쉬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괜히 또 바람을 넣어놓고 그래.. 알바 이상으로는 안 한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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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이륙합니다. 아.. 업무 종료군요..

 


업무 종료 전에 그 분과 악수도 했지만 사실 제 개인적으로 현 정권의 반대 입장이긴 합니다 ㅡ,.ㅡa
한 사람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 일했다고 말은 하지만 ㅎㅎ
(개인적으로 이런 운전 행사도 좋아하고 나름 돈벌이도 쏠쏠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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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석 로커패널 안쪽에 붙어있는 긴급출동 스티커.. 공교롭게 MB입니다 ㅎㅎ

 

 

사실 군대에 있었던 10년 전부터 이런 일을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멍석이 깔리니까 너무 재밌더라구요 ^^
정말 제대로 된 의전행사의 운전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직접 경험해봤네요.
(정상 회담은 각 국의 차량이 동시에, 정 가운데에 도착해야 된다는데 이제 그것만 남았나요? ㅎㅎ)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다들 피곤했었고 긴장을 많이 하셨던 덕분인지

아무런 탈 없이 잘 끝나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고생하시고 노력하셨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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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이런 일도 없고, 학업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어제 머리를 짧게 깎았습니다.

하반기에 운전 알바가 2개나 벌써 예약되어 있네요 ㅎㅎ

 

안전운전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