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도처에 잠복해 있는 강호들을 만나는 건 항상 새로운 도전(50%)+기쁨(10%)+흥분(40%)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렸을 적, 운동장에서 100m 달리기를 한다고 여러명이 나란히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 당시 초조하게 뛰고있는 제 심장과 비교한다면 또 다른 느낌이 있더군요.
 
R32와 함께하는 동안 상당히 많은 강호들과 붙었습니다. 차의 성능과 상관없이 상대의 화려한 스킬에 무언의 박수를 보낸 적도 많았고, 차는 좋은데 메너없이 행동하는 폭주족 양아치들도 많이 만났었는데...
그런 저런 저의 모든 배틀을 돌이켜 볼 때, VW의 Sirocco와의 배틀은 정말 승패와 상관없이 멋진 한판으로 기억될 것만 같습니다.
 
편의상 존칭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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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 Bay 880 도로는 넓기도 하지만, 교통량도 많고 평균속도도 80마일정도로 상당히 빨리 움직이는 차들과 섞여 달리다 보면, 내가 달리고 있는 속도가 몇인지 망각하게될 때가 많다. 그날 역시
3천5백에서 뿜어져 나오는 R32의 멋진 배기음을 듣기 위해 항속시에도 슬그머니 발에 힘을 주는 내 자신을 보면, 웃음 짓고 있었는데...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여러차량들을 유연하게 추월을 하면서 집으로 가는 237도로를 타려고 접어들고 있었다.
 
어랏... 저 앞에 보이는 검은색 차량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감지 할 수 있었고 모르는 뒷꽁무니여서 그런지 빨리 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쉬프트 다운을 하고 쫓아가기 시작한다. 그 정체불명의 검둥이는 뒤에서 쫓아오는 차량을 의식했는지 움직임이 더 바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 차의 뒤 꽁무니에 붙어있던 베찌는 VW의 Scirocco 16V
 
저게 뭘까... 고민할 틈도 없이 상대는 또 쭉 뻗어 나간다.
좋아~ 붙어보자. 나 역시 나의 R32를 전투적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차량이 제법 많은 관계로 상당한 칼질이 필요했고, 그 친구 역시 엄청난 몸놀림으로 차량들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제대로 붙어보니 가속은 R32가 우월했으나 몸놀림은 단언하기 힘들었다.
100마일을 넘어가는 속도에서도 칼질하며 뻗어나가는 Scirocco가 전혀 불안해 보이지 않는 건 80년대 생산된 차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빠른 몸놀림에 감탄하고 있던 것도 잠시...
난 그 친구를 앞질러 나갔다.
 
그냥 지나쳐가기가 너무 아쉬웠는지 약간 속도를 줄이니 그 친구가 옆으로 온다.
둘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 엄지를 치켜 올렸다. 대화나 기술적인 설명이 필요없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순간을 배틀의 백미라 생각한다. 허나...
그 친구가 다 시 앞서 나가는데, 이게 왠일인가~@!
 
그 친구 뒷 자석에는 갓난아이가 베이비시트에서 바둥바둥 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럼 저 친구 저 애를 태우고 120마일을 넘나들었단 말인가...
생각을 하니 아찔해 진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 와 같은 'Babe on board'도 안 붙이고 그리 내질렀단 말인가...
 
멀어져 가는 그 친구를 바라보면서, 왜 자꾸 삼국지에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을 데리고 조조의 진영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이 상당되는지...
 
그 친구는 나보다 더 고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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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VW Scirocco를 찾아 봤습니다.
코라도는 몇 번 봤는데... 맥을 같이 하는 차종인듯 싶더군요.
몇몇 오너들은 VR6엔진으로 스왑하고 달린다던데... 어쩌면 그 날 붙은 그 친구의 차가 그런차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태우고 그렇게 달릴 수 있는 깡에서 이번 배틀은 제가 졌다는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