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편도 7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다 보니 주말부부란게 말처럼 쉽지많은 않다. 잘된일인지 아닌지 다음주는 주초부터 용인에서 볼일이 있어 어차피 올라가야하니, 이번주말은 스킵. 대학시절 곧잘 어울리던 동창이 4시간 거리라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게 떠올라 전화 한통 넣고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차에 관심이 있건 없건 경제활동을 시작한 사내들의 술자리에 차 얘기가 안나올리 만무. 어라 월 리스료가 300? 이 친구 정말 차에는 무관심했던 친구다. 305마력짜리 SLK란다. 으응? 350마력 55AMG란 말인가? 다음순간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나 한번만 타볼께.... ^^;'  아무리 차에 무관심하더라도 3000km도 채우지 못한 새차를 2년만에 만난 친구에게 건네는게 누구에게나 쉬운일은 결코 아니다. 다음날 아침 정말로 키를 건네주는 친구, 내색은 안하지만 걱정의 눈빛이다. 애써 정말 애써 무시하며 아무렇지 않은듯 몰고 나와버리고 말았다.


'300마력인가 아닌가'
불과 10년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초고성능의 상징이었던 '300마력'은 어느새 각메이커의 엔트리급에서도 자연스럽게 볼 수있는 수치가 되었다.
똑 부러진 컨로드를 바라보며 앞으로 300마력 넘기기 전에는 절대 현대차를 사지 않겠다던 누군가의 절규를 들었는지 현대에서도 303마력을 출시했으니 보편화는 분명한 사실.
사실 160마력 1.8 컴프레셔 주제에 200마력이 넘는 고배기량 상대들을 줄줄이 뒤에두고 달리던 어느 가을날의 C클래스 쿠페나, E46 M3와 지겹게 비교되던 '70마력 씩이나' 모자란 SLK350 오너들을 꼭 증인으로 세우지 않더라도 '벤츠의 고속주행에는 마력 이상의 무엇이 있다'에 동의를 구하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아쉬워서? 아니면 내연기관 친환경화가 낳은 의도되지 않은 고성능화?
이유야 어찌됐건 2009년 SLK의 V6 유닛은 무려 33마력이나 더 얹어져 '마력 만큼만 달려도 훌륭한' 305마력이 되었다. 그나저나 55AMG는 아니었군.


실버에로우
1950년대를 날아다니던 300SL을 사진으로 조차 본적이 없는 6살 꼬마아이도 벤츠를 실버에로우라고 부르는걸 들어본 일은 있을지 모른다. 걸윙까지 계승한 SLR이 다시금 상기시켜주기 이전에도, 멕라렌 메르세데스팀은 축구팀인줄 아는 이들에게도 '실버에로우'는 잊혀지지 않고 벤츠의 로드카들과 함께 해왔다.
은색이 어울려서 인가? 화살처럼 빨라서인가? 혹시나 궁금했을지 모를 누군가에게 이보다 더 좋은 본보기가 없다. 
2009 SLK350 AMG의 더욱 남성적으로 변한 프론트나 사이드 스커트, 리어 디퓨져등을 꼭 설명하지 않더라도, 롱노즈 숏데크, 높은 허리라인, 앞으로 쏟아질듯한 캐릭터라인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때? 은빛화살 같지?'에 고개를 저을 이가 몇이나 있을까.


주차장
억지같지만 대체로 고성능 차는 타고 내리기가 어렵다. SLK도 마찬가지인걸 보니 일단 막연한 첫인상은 고성능.
착 감아줄듯한 스포츠시트. 그러나 적어도 80-90kg은 돼야할까? 75kg이 안되는 체구로는 다소 헐거운 느낌이다.
메뉴얼까지 뒤적여야 했던건 온보드컴퓨터의 몇가지 항목뿐, 운전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작은 직관적인 버튼 터치로 무리없이 이루어진다. 스티어링에서 각종 버튼으로 이어지는 동선도 자연스럽고 나중에 발견한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주행중에 거슬릴만한 배열은 눈에 띄지 않는다.
원래 인테리어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성향이라 찾으란다고 찾을 수도 없지만.
이 얼마만의 V6 시동음인가. 낮게 깔리는 음색이 만만치 않은 인상이다. 페달 터치에 반응하는 거동 정도가 입맛에 딱 맞는다. 내가 나이를 먹은 것인가? 벤츠가 젊어진 것인가?


이동수단
첫 이동 코스인 일산까지는 250km 남짓. 적응을 위해 평소보다 사이드/룸 미러를 더 자주본다. 의외로 사이드미러 사각이 상당하다. 여느 독일차들과 마찬가지로 턴 시그널 레버는 역시나 멀다. 손이 작은편은 아닌데, 독일여자들 손가락길이가 문득 궁금해진다. 
루프의 잡소리와 160이 넘어가면서 들려오는 풍절음이 거슬리지만 이 속도대만 피하면 문제는 되지 않는다. 저속에서는 나지 않고, 고속에서는 엔진음에 묻히니 말이다. 
컵홀더가 있을법한 자리에 없어 당황한 것도 잠시, 혹시?하며 눌러볼만한 곳에 역시나 얌전히 숨겨져있다.
7단 변속기는 변속 시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부드럽게 이어준다. 크루징 기어인 7단에서 3000회전이면 속도가 140에 이를정도로 연비와 정숙성에 부족함이 없는 구성이다. 신호 사이 사이 가벼운 가속중 삐져나오는 잔잔한 부밍음도 듣기 좋은 정도.


Easy Drive
테크니컬 스팩이 비슷한 차도 많고, 각종 실측치가 거의 일치하는 차들도 많다. 실제로 달려봐도 다 같을까? No. 운전자가 달라지면 실측치가 완전히 달라지는 차들과 누가 운전해도 항상 빠른 차. SLK는 후자 쪽이다.
메뉴얼 모드에서도 변속기가 레버조작에 즉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변속될 때의 직결감은 유체 컨버터를 감안한다면 최고다. 7단으로 순항중 급가속을 원하면 답답한 쉬프트 페들을 괴롭힐것이 아니라 그냥 오른발을 꾹 밟는것이 좋다. 운전자의 의도를 파악하자 마자 2단이고 3단이고 뛰어넘어 최적의 단수에 맞춰 튀어나간다. 수동모드에서는 킥다운을 지원하지 않는 최근의 일부 자동변속기와 배치되는 이러한 셋팅은 단순히 구식이라기보다는 누가 운전해도 빠른 차와 겹친다.
변속모드는 M-S-C 로 구성되는데 자동모드인 S와 C 에서도 쉬프트 페들을 건드리면 수동모드로 진입한다. M모드에서는 킥다운시 다운된 단수가 유지되는 반면 S와 C는 킥다운 이전의 단수로 돌아간다는 점이 다르다. 쉬프트 인디케이터도 S와 C에서는 몇 단으로 킥다운 되었는지 표시하지 않는다.
존재감 약한 C는 그렇다 치고 M과 S 사이는 자주 오가게 되는데, 주차장에선 별 생각 없었던 M-S-C 변환 버튼의 위치가 스티어링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오조작이 있더라도 안전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버튼이기에 더욱 그렇다.
초시계로 대충 체크한 100-200은 14초 근방. 5.4초의 0-100을 감안하면 정지에서 200까지 20초가 채걸리지 않는 제대로된 '300마력클럽'회원이다.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고 있으면 매뉴얼 모드에서도 회전제한에 걸리기 전에 강제변속되는데, 리미트인 7200 직전까지 힘을 뽑아내려는듯 회전계 바늘이 7을 스치며 변속된다.
가속페달을 밟고 킥다운이 완료되어 차가 튀어나가기 까지 아주 약간의 딜레이가 있긴 하지만, 넉넉한 토크덕에 변속이전의 단수에서도 가속감을 느낄 수 있고 앞서 언급한데로 '직결'되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지에서도 계기판의 260을 꽉 채우고 GPS 256에 이르는 속도제한 시점까지 밀어붙인다. 이 이상 속도가 여유로울것 같다고 하기엔 6단 변속후 가속이 더디긴 하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가 끝은 아니다. 제한장치가 작동하는 느낌도 확실하다. 
하드탑의 풍절음은 엔진음에 묻혀 들리지 않으니 문제가 아니지만, 가벼운 차체와 하드한 하체가 노면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회전수 또한 남김없이 쏟아붇는 통에 최고속 주행이 의외로 쾌적하지만은 않다. 이렇게는 달리지 말란 얘긴가? 하고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이 차의 진가가 드러난다. '그래.. 이거야 이거..' 브레이크 답력이나 제동거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밸런스가 압권이다. 가볍고 노면에 민감하여 주행이 불안하다면 브레이킹은 더 불안한게 대부분이나 SLK는 그런 일반론을 비웃는다. 10점 만점에 11점.
차도 생겼겠다 얼굴 보고 싶어져 한걸음에 달려간 와이프에게 사진 촬영 동승까지는 승인을 받았으나, 와인딩 공략은 말도 꺼내보지 못했다. 물론 친구의 새차를 코너에 내던질 실력도 간도 없다. 아쉬운데로 각종 램프를 빠져 나오며 힘껏 가속페달을 밟아봤으나 ESP 표시등은 무소식이다. 실력이 모자라 한계를 보지 못한 것이 맞다곤 해도, 어쨌든 셰시 자체의 한계가 상당한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 그 와중에도 컨티넨탈 CSC3 의 횡 그립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Vario Roof    
만인앞에 태양빛을 한껏 받으며 원기를 회복하는 슈퍼맨 보다는 지하에서 외로이 상처를 꿰매는 배트맨 취향이고, 야간에 도어 오픈시 실내등이 켜지는것 조차 싫어하는 성향상 컨버터블은 구매리스트에 올라간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제껏 탑을 오픈하고 달려본건 대학시절 제주도에서 빌린 엘란이 전부. 그마저도 신호등에서 만난 아반떼에게 따이는 통에 산통이 깨졌지만.
다행히 캣우먼 취향의 와이프를 만나 컨버터블 고민은 안해도 되나, 배트맨과 원더우먼, 슈퍼맨과 캣우먼이 만나게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래서 여기 SLK가 있다. 응? 컨버터블 이었어? 할정도로 위화감이라곤 찾기 힘든, 멋지기까지 한 탑 디자인. 20초면 충분하고 남는 개폐시간. 중간에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버튼을 누르고 있을 때만 움직이는건 기본이고, 계기판에 디스플레이 되는것도 물론이다. 이정도면 밤에는 탑을 닫고 배트맨이, 낮에는 탑을 열고 브루스 웨인이 써도 되지 싶다.
에어스카프는 송풍구까지의 거리가 있어서인지 바람이 나오려면 기다려야 하지만 일단 나오기 시작하면 헤어드라이어 부럽지 않다. 
시트 뒤 롤바에 걸게 되어있는 메쉬 타입의 윈드 스크린은 뒤에서 들이치는 바람을 막아주는 대신 야간에 후방 차량들의 전조등을 산란 시키는 부작용도 있다. 더구나 4군데 포인트에 모두 고정하려면 힘깨나 써야한다. 또 운운해서 미안하지만 독일여자들 힘이 어지간히 센가보다.



음향
취향대로 걸어본 CD는 '다크나이트' 스코어. 첫번째 트랙인 'Why so serious?'의 미드레인지 퍼큐션을 잘도 잡아낸다. 사실 고음과 저음은 안되면 이퀄라이저라도 괴롭혀 비슷하게 듣는다해도, 미드레인지는 특히 시스템 자체가 안 잡아주면 그 음반 잃어버릴때까지 그런 음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만카돈 로직7 서라운드가 얼마짜린지는 모르겠으나, 한참 오디오질 하던 98년 시세로는 최소 300만원짜리  소리다. 
가속시 귀를 자극하는 소리는 뒤쪽 보다는 앞쪽에서 더 많이 들려온다. 11.7 :1 의 숏스트로크 V6가 회전하는 소리가 왠만해서 듣기 싫을리가 없지만, SLK의 그것은 또 다른 맛이 있다. 여태껏 주로 고음 위주로 즐겼던 탓인지 유난히 낮고 굵게 들린다. 
가속과 함께 엔진음이 커지면 오디오 음량도 덩달아 커진다. 그 조절 정도가 마치 옆에서 듣고 일일이 맞춰준 정도로 딱 맞는것이 만족도 그만이다.



와인과 자동차
나름대로 역사도 있고 품질도 좋았지만 '프랑스 와인'에 눌려 유럽인들의 노골적인 무시를 받아온 신대륙와인. 1976년 파리에서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이 레드/화이트 공히 최고의 와인으로 선정되면서 그 맛과 질을 인정받게 된다. 그럼에도 대다수 와인 애호가들의 경배를 받는 와인은 여전히 프랑스 와인이다. '문화를 마신다'는 그들의 감성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맛과 향이 전부가 아니라 라벨에 담긴 문화와 역사이기 때문이다.
각종 레이스에서 또는 비교 테스트에서 '독일차'가 아닌 신대륙차들의 훌륭한 성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아예 수년간 수상대를 독점한 일들도 있으니 와인 이상으로 성능을 인정 받았다. 그러나 역시 최고로 높은 가격에 팔려 나가고 수많은 팬들을 거느린 차는 아직도 독일차 들이다. 

타인의 감성 영역에 본인의 잣대를 들이미는것 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맛을 살것이냐 거기에 라벨도 함께 살것이냐. 성능을 살것이냐 엠블럼도 함께 살것이냐.

2009 SLK350 AMG package는 단지 성능 만으로도 참기 힘든 유혹이다. 거기에 그릴에 붙은 세꼭지별은 성능 이상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 넘친다. 8790만원이 비싸다고 느껴진다면 엠블럼 값에 대한 기준이 다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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