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차는 짧은 시간에 대단한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30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외국 모델을 도입해 생산하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 보면 디자인도 허술하고 기술도 대단치 않지만 하나하나가 국산차의 밑거름이 됐다. 이런 자동차들의 광고를 보는 것도 국산차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자 또 다른 재미라고 할 수 있다.

■ 아시아자동차 피아트 124

피아트 124는 1966년부터 아시아자동차가 국내에서 조립 생산을 시작했다. 124는 당시 국내에는 보기 힘든 고급 소형차라고 할 수 있다. 각진 디자인은 차체 사이즈 이상의 고급스러움을 풍겼고 보기와 달리 실내 공간도 넓었다. 성능도 빼어난 수준이었다.

1.2리터 엔진은 65마력의 힘을 발휘해 작은 차체를 가볍게 이끌었다. 최고 속도도 145km/h나 됐다. 1971년 모델 체인지된 124의 최고 속도는 150km/h까지 올라갔다. 피아트 124의 1.2리터 엔진은 페라리의 아우렐리오 람프레디가 설계한 엔진이기도 하다. 124는 1973년까지 6,800대가 팔렸다. 꾸준한 판매를 보였지만 피아트와의 계약이 결렬돼 단종 됐기 때문이다. 아시아자동차는 피아트 124를 끝으로 승용차 사업을 접고 상용차에만 집중했다.

■ 지엠코리아 카미나

새한자동차의 전신은 지엠코리아이고 카미나는 새한 제미니의 전작이다. 오늘날 GM대우의 소형차의 계보가 시작됐던 모델 중 하나가 카미나이다. 지엠코리아는 카미나로 승용차 시장에서 현대, 아세아 등과 경쟁 체제를 이루려 했다. 신진자동차는 토요타의 관계가 끝나자 GM과 함께 지엠 코리아를 설립했고 시보레 1700을 내놨다. 하지만 시보레 1700의 판매가 저조해 이를 극복하기 위해 후속 모델을 카미나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카미나 역시 인기가 없어 생산이 1천대를 넘지 못했고 곧 제미니로 대체됐다.



■ 기아산업 브리사

브리사는 정부의 국민차 계획 중 하나였다. 기아가 소하리에 공장을 설립하고 첫 생산 모델이 바로 브리사였고 자동차의 국산화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베이스 모델은 마쓰다 파밀리아였지만 기아는 상당수의 부품을 국산화에 성공했다. 생산 이듬해에는 국산화율이 80% 이상을 넘어갔다.

브리사는 62마력의 985cc 엔진을 얹었다. 하루 유지비가 2천원이라는 광고 문구에서 알 수 있듯 경제성을 가장 큰 무기로 내세웠다. 한때는 브리사의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기도 했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브리사가 출시되던 당시는 전 세계가 오일 파동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연비 좋은 차가 각광을 받았었다. 브리사의 연비는 23km/L였다. 연비 좋고 내구성도 좋았던 브리사는 출시와 동시에 큰 인기를 얻어 1974년부터 81년까지 7만 5,987대가 생산되는 성공을 거뒀다.

■ 대우자동차 로얄 시리즈

대우 로얄 시리즈는 1972년의 레코드 190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레코드는 오펠이 베이스로 로얄이라는 이름은 1975년부터 쓰였다. 로얄 시리즈는 대우가 중형차 시장에서 강세를 보일 수 있었던 결정적 공신이었고 1991년까지 오랜 기간 생산됐다.

로얄 시리즈는 인기만큼이나 다양한 모델이 나왔다. 대우는 80년대 들어 살롱과 프린스, XQ, 살롱 수퍼, 프린스를 내놓았고 이들 모델은 고급차 오너에게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80년에 나온 로얄 디젤은 경제성을 강조한 모델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큰 차체와 맞지 않는 1.5리터 가솔린 엔진 모델(XQ, 듀크 등)은 힘이 없다는 악평에 시달려야 했다.

■ 새한자동차 엘프

엘프는 새한자동차의 중형 트럭이다. 1976년 새한 중형트럭으로 1년만 생산 됐고 곧 엘프라는 차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형트럭은 마쓰다의 타이탄을 들여온 모델로 판매는 극히 부진했다. 그래서 도입한 모델이 이스즈 엘프였다.

엘프는 2.5톤급 중형 트럭으로 2,775cc 85마력 디젤 엔진을 얹었다. 강력한 엔진과 동급에서 가장 넓은 적재함을 내세워 자영업자에게 어필했다. 광고 모델로는 당시 큰 인기를 누렸던 권투선수 김태식을 내세웠던 게 눈에 띈다. 엘프는 2.5톤 이외에도 1.4톤과 3톤 보디도 나왔다. 새한을 인수한 대우는 1987년 엘프2를 내놨지만 인기는 얻지 못했다.

■ 새한자동차 제미니

70년대 중반에는 여러 승용차가 출시됐고 이중 하나가 새한자동차의 제미니였다. 1977년 출시된 제미니는 시보레 1700과 카미나로 이어진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모델이다. 트렁크가 튀어 나온 노치백(세단) 스타일은 국내 소비자의 기호에 맞았다.

GM은 월드카를 목표로 유럽의 자회사 오펠에게 카데트를 개발케 했다. 일본의 이스즈는 카데트를 자국 시장에 맞게 개량했고 이를 들여온 것이 새한자동차의 제미니였다. 제미니는 경쟁 모델에 비해 주행 성능이 좋은 것은 물론 트렁크도 넓었다. 1977년 출시돼 4년 동안 2만대 가까이 생산됐다.

■ 새한자동차 맥스 트럭

1979년 나온 새한자동차의 맥스 트럭은 한국 최초의 디젤 픽업 트럭이다. 지금의 1톤 트럭처럼 자영업자에게 인기를 끌었다. 인기의 이유는 가솔린 대신 2천 cc 디젤 엔진을 얹어 경제성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베이스 모델이 제미니라서 포니 픽업과도 경쟁 관계에 있었다. 광고에서도 경제성과 픽업으로서의 기능성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65마력의 디젤 엔진은 최고 속도가 100km에 불과했지만 도심 운행에는 충분한 성능이었다. 적재 하중은 1톤이 채 되지 않았다. 차후 하드톱 모델도 출시됐다. 현재는 박물관에 2대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피아트 132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한 기아산업은 124의 신뢰성을 높게 평가해 다시 피아트 모델을 도입하기로 결정한다. 1979년 출시된 피아트 132는 124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스타일이나 실내 공간, 편의 장비까지 작은 럭셔리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번영과 영광의 길’이라는 광고 카피에서도 그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광고에서도 볼 수 있듯 파워 스티어링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앞선 편의 장비였다.

피아트 132에는 112마력의 힘을 내는 2리터 엔진이 올라갔고 최고 속도는 171km/h에 달했다. 132 사이즈의 소형차에 2리터 배기량은 그야말로 호화 엔진이었고 국내 첫 DOHC 엔진이기도 하다. 변속기도 다른 모델과 달리 5단이었다. 기아산업이 생산한 피아트 132는 부품의 국산화율이 80%를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 생산분에는 피아트 132 엠블렘이 장착되지 않기도 했다.

■ 기아산업 봉고

기아를 얘기할 때 봉고를 빼놓을 수 없다. 경영이 어려웠던 기아를 살려낸 게 바로 봉고이기 때문이다. 1980년 출시된 봉고는 나오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승합차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9인승 봉고 나인은 2종 보통면허로 운전이 가능한 것도 장점이었다. 지금도 봉고는 승합차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한다. 봉고는 1982년 한 해에만 1만 1천대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포니 못지 않은 봉고 신화였다.

기아는 마쓰다의 봉고를 들여와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결정적 이유는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때문이다. 트럭만 만들어서는 수익을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인기가 좋자 1987년에는 파워 봉고, 89년에는 와이드 모델을 내놓으면서 꾸준한 인기를 살렸다. 봉고는 베스타와 프레지오로 모델 체인지 됐고 지금은 트럭 이름에만 쓰이고 있다.

■ 새한자동차 맵시

새한자동차는 카미나에 이어 이스즈 제미니까지 들여왔지만 또 다시 실패를 맛봤다. 심기일전해 출시한 모델이 맵시이다. 이름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뿌리는 여전히 3세대 오펠 카데트와 제미니였다. 82년 출시된 맵시는 제니미의 외관을 고치고 몇몇 편의 장비를 담았지만 여전히 경쟁력은 떨어졌다. 맵시는 곧 맵시-나로 교체됐고 고급 모델인 하이 디럭스는 85년에 나왔다.

하이 디럭스 모델의 경우 로얄 살롱과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해 최대한의 고급스러움을 노렸다. 엠블렘도 왕관 모양이었고 트렁크도 맵시보다 커졌다. 광고 카피에서도 품위가 안전, 경제성이라는 말 보다 먼저 나온다. 맵시-나에는 85마력의 XQ 엔진이 올라갔고 이는 대우가 처음으로 자체 개발한 엔진이다. 맵시-나는 자동변속기도 고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