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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은 이랬습니다.
운전병이 모자르다.
그래서 일반 운전병으로 차출되었다가 대형 버스 면허를 따려고 했더니만
부대의 1호차 운전병을 안하면 모든 휴가, 외박 다 자르겠다는 엄포하에 울며 겨자먹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의전행사 운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상병도 달지 않은 상태에서 고참들 눈치보느라 뻑하면 왁스칠하고 먼저 나가서 대기했던 습관이 남들 눈에는 좋게 보였나봅니다.
언제부턴가 저도 모르게 한여름에도 왁스칠을 즐기는 상황이 되더군요.
제대를 앞두고 유학을 준비하던 시점입니다.
저도 모르게 여기저기 입소문이 좀 돌았나봅니다.
하사관으로 지원하라는 부추김과 전문 기사직 제의까지..
20대 초반에 받을 수 있는 초봉치고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제 자신을 버리고 뒷좌석에 앉아계신 그 분을 위해 헌신해야만 살아남는 직업이 바로 기사입니다.
저도 언젠가 가정을 이룰텐데 세상에 두 사람에게 저를 헌신하기에는 제 몸이 한 개가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어디선가 운전 아르바이트 자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독일 내에 전시회나 각종 회의를 방문하시는 한국 대기업 임원들의 차량을 운전할 사람이 필요했던거죠.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호기심에 살짝 발을 담궜는데 첫 시작부터가 또 1호차입니다.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어느 아르바이트보다 보수가 센 편입니다.
남들 눈에는 말쑥한 정장입고 좋은 차 운전하니 쉽게 돈 버는 것처럼 보이는가봅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샤워하고 제일 좋은 수트에 넥타이까지 멥니다. 머리는 물론 발끝까지 용모 단정이 기본입니다.
동이 채 트지도 않은 시간에 세차를 하고 7시 남짓한 시간에 대기합니다.
스케쥴 상에 나와있는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해서 사전 답사는 필수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사를 한다거나 차량 정체가 있을 시를 대비해서 plan B와 plan C까지 머릿속에 그려놓습니다. 때로는 예정에 없던 목적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내비게이션은 쓸 수 없습니다.
언젠가 뒷좌석에 계신 분이 '야.. 내비 틀고 가더라. 그럴라면 택시타고 다니지'라고 농담으로 하셨던 말이 화근이 됐나봅니다. 저 역시도 택시 기사분이 내비게이션 찍고 가면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하긴.. 군대에 있을 때에도 내비게이션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3D 내비게이션도 무용지물입니다
멈추지 않는다.
의전 행사의 정석입니다.
그 분께서 절대 기다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오실 시간 전에 문 앞에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수행 비서가 있을 경우에는 운전석 앞에 서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가 뒷좌석 문을 열고 닫아야 합니다. 물론 두 손으로 말이지요.. 부드럽게 출발하고 부드럽게 멈춰야 합니다.
조금 밀린다고 지그재그로 운전하면 격 떨어지는 행동이기 때문에 조용히 흐름에 맞춰서 운전해야만 합니다.
그런 이유로 BMW는 1호차 수행용 차량으로 안성맞춤이고(먼저 치고 나가야 할 상황이 꽤 있습니다) 메르체데스 S600은 너무 힘이 넘쳐서 부담스럽습니다.
대기시간이 심심합니다
차 안에서는 들은 것도 못 들은 것이 되고, 묻는 말에 간단 명료한 대답만 합니다.
장기간 곁에 두는 기사가 아니라면 뒷좌석에 계신 그 분의 외로움을 달래줄 생각은 감히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쓸데없는 오지랖은 안하니만 못합니다. 과묵함이 최선입니다. 후진 기어도 넣으면 안됩니다. 불안감을 조성하면 안되거든요.
최근에 나오는 고급 승용차에는 사각지대에 있는 차를 알려주는 경고 장치가 있는데 BMW 7시리즈는 스티어링 휠에 진동으로 알려줍니다. 반면 S클래스는 경고음이 울리는데
이 때문에 의전용으로 S클래스를 운전하게 되면 모든 안전 장비를 꺼버리게 됩니다.
최신 기술을 본의 아니게 쓸 수 없는 상황이 오는거죠.
같이 달리는 일행이 있다면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것이 서로간에 도움이 됩니다.
빠른 식별이 가능하고 움직임이 파악되기 때문이죠. 차선 변경 시에는 뒷차가 먼저 자리를 잡아줘야 합니다. 시내 주행시에 신호등에서 앞 차를 놓치게 되면 앞서간 차는 천천히 주행하여 뒤따라오는 차에게 시간을 줘야 합니다. 2대가 주행할 경우에는 첫번째 차가 차선의 오른쪽으로 붙고 뒷차가 왼쪽으로 붙습니다. 그래야 앞차가 뒷차의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더욱이 추월하려고 할 때 뒷 차가 먼저 상위 차로를 차지하기 유리합니다.
이런 상호간의 협조가 없으면 그룹 드라이빙은 엄청나게 힘듭니다.
사실 독일 현지 교포들과 운전을 하면 이런 호흡이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운전병 출신이었던 유학생이라면 조금 더 쉽습니다.
한 번 같이 일했던 이태리 전문 기사분이 있었는데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그와 운전을 했어도 이런 호흡이 맞아서 굉장히 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차를 정차하는 위치도 중요합니다.
뒷좌석 문이 열리면 그 자리에서 일직선으로 현관문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9시 뉴스를 보면 검찰청에 도착하는 검은색 차량만 봐도 그렇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분은 절대 사선으로 입장하지 않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자동으로 잠김상태가 되었던 도어락을 풉니다. 그러면 제 옆자리에 앉은 수행비서가 '다 왔구나'라는 눈치를 챌 수 있죠.
차를 멈추면 저도 따라서 내려야 합니다. 특히나 제 뒷좌석에 누군가가 있을 때에는 물론이구요.
도로변에 차를 정차할 경우에는 뒤에서 오는 차량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는 동작이 좀 급해져서 때로는 기어레버가 P에 있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메르체데스 S클래스는 기어레버가 D나 R에 있을 때 문을 열면 자동으로 차가 멈춥니다.
차 문을 열고 나갔던 운전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는게 악셀 페달을 밟아서 사고가 났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 모든 상황이 끝나고나면 재빠르게 뒷좌석을 확인해서 놓고 내리신 중요한 물건은 없는지
확인 후 유턴을 두 번 해서 차를 돌립니다. 언제든지 내려드렸던 현관문에 도달할 수 있게끔 차를 준비해 놓는 것이죠. 가끔 일행이 많아서 5-6대가 동시에 서 있는 경우에는 서열 순으로 차량을 배치해 놓습니다. 운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신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가끔 도로의 흐름을 방해할 때가 있어서 굉장히 송구스럽습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차를 세워놓고 뒷좌석 문을 열어 청소를 합니다. 발판을 털고 유리창에 지문을 지우고,
한모금이라도 마셨던 생수병은 모조리 쏟아버리고 새것으로 바꿔놓습니다.
재떨이도 항상 확인하여 비우도록하고 가능하면 물에 적은 티슈를 재떨이 안에 깔아놓습니다.
끼니는 거르기 십상입니다. 알아서 눈치껏 챙겨먹어야죠.
혹여나 못 먹더라도 뒷좌석에서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물어보시면
'예. 알아서 해결했습니다'라고 대답해야만 합니다. 예의상 물어보시는 인사에
'아니요 아직 못 먹었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 분을 당황스럽게 만드니까요..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됩니다.
기업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은 그 분께서 잠들기 전까지 숙소 앞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4시간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간중간, 낮에 짬을 내어 자는 건 어떻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차에서 세상 모르고 자다가 전화 소리에 놀래서 급하게 차를 대놓으면 비몽사몽이라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는 정신상태가 됩니다.
독일의 호텔은 한국과 달리 로비에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조금 더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어차피 자주 호텔 벨보이와 마주치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는 것이 서로 편합니다. 로비 앞에 손님을 싣고 내리는 공간은 범접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그것이죠. 그들이 한가할 때에는 먼저 다가가서 말도 좀 걸어주고 때로는 사소한 물건이라도 선물이라며 건네줍니다. 그들도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하니까요.. 그러다보니 베를린의 몇몇 호텔의 벨보이와는 지나가며 손 흔들고 인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제 차는 정말 장난감 같네요 ㅋ
솔직히 의전행사 운전, 누구한테 제대로 배운 적도 없지만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생기고
여러 전문 기사님들을 만나고 보게 되면서 몸으로 익힌 부분도 많습니다.
이 직종도 매뉴얼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글로 쓰다보니 생략한 부분도 많습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 유난히 이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햇수로 독일에서만 5년째.. 이제 왠만한 대기업 의전 담당 직원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더라구요.
경력에도 쓸 수 없는 말 그대로 아르바이트이긴 하지만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고 기업마다의 특성도 눈에 보이더군요. 그러다 불현듯.. '아.. 이거 정말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대리급 직원들이 와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을때
대답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알아차리게 되더군요.. '어느 순간 내가 꾼이 되었구나..'
기다림과 고독, 외로움이 친구가 됩니다
능숙함이 좋긴 하지만 자꾸만 이 일에 안주하게 됩니다.
제가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이 아니라서 더 그런 것 같구요..
하지만 빠듯한 유학생 생활에 꽤나 큰 금액의 이런 아르바이트는 거절이 안됩니다.
더욱이 언제부턴가 너무 믿어주시는 고용주 분들 덕분에 책임감이 더 늘어서
어떤 때에는 학업을 제치고 이 일을 할 때도 있었거든요..
군대에서의 그 생활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독일에서 몰았던 의전 차량을 떠올려보면
8-9인승 각종 van부터 중형급 세단, BMW 7시리즈 730d부터 760iL까지,
메르체데스 벤츠 S350부터 S500L까지 참 다양하네요.
van은 의전에서 셔틀 개념입니다.
밴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죠..
처음에 S클래스나 7시리즈를 받았을 때는 설명서를 놓고 몇 시간씩 공부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Audi A8나 VW Phaeton도 좋은데 한국 분들이 무조건 벤츠만 고집하셔서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이번에 Audi A8 3.0 TDI가 한 번 있었는데 그 분께서 어찌나 불평하시던지 그 차를 운전했던 친구가 꽤나 고생했습니다만 ㅋ
BMW 7시리즈는 정말 괴물이라는 기억이 너무 강렬합니다.
이런거 저런거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이 S클래스가 의전용으로 최적인 것 같습니다.
연비 면에서는 디젤이 좋지만 정숙성에서는 휘발유 모델이 적합했고, 실내외가 깔끔하고 엘레강스한 디자인이 최적이었죠.
S600이나 S65 AMG는 너무 힘이 넘쳐서 운전했던 독일 기사 친구가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내년 봄까지는 이런 행사 제의가 없을 듯하니 이제는 학업에 매진해야겠네요. 저도 이제는.. 제 일을 갖고 그 일에만 몰두했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그래서 일반 운전병으로 차출되었다가 대형 버스 면허를 따려고 했더니만
부대의 1호차 운전병을 안하면 모든 휴가, 외박 다 자르겠다는 엄포하에 울며 겨자먹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의전행사 운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상병도 달지 않은 상태에서 고참들 눈치보느라 뻑하면 왁스칠하고 먼저 나가서 대기했던 습관이 남들 눈에는 좋게 보였나봅니다.
언제부턴가 저도 모르게 한여름에도 왁스칠을 즐기는 상황이 되더군요.
제대를 앞두고 유학을 준비하던 시점입니다.
저도 모르게 여기저기 입소문이 좀 돌았나봅니다.
하사관으로 지원하라는 부추김과 전문 기사직 제의까지..
20대 초반에 받을 수 있는 초봉치고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제 자신을 버리고 뒷좌석에 앉아계신 그 분을 위해 헌신해야만 살아남는 직업이 바로 기사입니다.
저도 언젠가 가정을 이룰텐데 세상에 두 사람에게 저를 헌신하기에는 제 몸이 한 개가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어디선가 운전 아르바이트 자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독일 내에 전시회나 각종 회의를 방문하시는 한국 대기업 임원들의 차량을 운전할 사람이 필요했던거죠.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호기심에 살짝 발을 담궜는데 첫 시작부터가 또 1호차입니다.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어느 아르바이트보다 보수가 센 편입니다.
남들 눈에는 말쑥한 정장입고 좋은 차 운전하니 쉽게 돈 버는 것처럼 보이는가봅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샤워하고 제일 좋은 수트에 넥타이까지 멥니다. 머리는 물론 발끝까지 용모 단정이 기본입니다.
동이 채 트지도 않은 시간에 세차를 하고 7시 남짓한 시간에 대기합니다.
스케쥴 상에 나와있는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해서 사전 답사는 필수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사를 한다거나 차량 정체가 있을 시를 대비해서 plan B와 plan C까지 머릿속에 그려놓습니다. 때로는 예정에 없던 목적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내비게이션은 쓸 수 없습니다.
언젠가 뒷좌석에 계신 분이 '야.. 내비 틀고 가더라. 그럴라면 택시타고 다니지'라고 농담으로 하셨던 말이 화근이 됐나봅니다. 저 역시도 택시 기사분이 내비게이션 찍고 가면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하긴.. 군대에 있을 때에도 내비게이션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멈추지 않는다.
의전 행사의 정석입니다.
그 분께서 절대 기다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오실 시간 전에 문 앞에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수행 비서가 있을 경우에는 운전석 앞에 서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가 뒷좌석 문을 열고 닫아야 합니다. 물론 두 손으로 말이지요.. 부드럽게 출발하고 부드럽게 멈춰야 합니다.
조금 밀린다고 지그재그로 운전하면 격 떨어지는 행동이기 때문에 조용히 흐름에 맞춰서 운전해야만 합니다.
그런 이유로 BMW는 1호차 수행용 차량으로 안성맞춤이고(먼저 치고 나가야 할 상황이 꽤 있습니다) 메르체데스 S600은 너무 힘이 넘쳐서 부담스럽습니다.

차 안에서는 들은 것도 못 들은 것이 되고, 묻는 말에 간단 명료한 대답만 합니다.
장기간 곁에 두는 기사가 아니라면 뒷좌석에 계신 그 분의 외로움을 달래줄 생각은 감히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쓸데없는 오지랖은 안하니만 못합니다. 과묵함이 최선입니다. 후진 기어도 넣으면 안됩니다. 불안감을 조성하면 안되거든요.
최근에 나오는 고급 승용차에는 사각지대에 있는 차를 알려주는 경고 장치가 있는데 BMW 7시리즈는 스티어링 휠에 진동으로 알려줍니다. 반면 S클래스는 경고음이 울리는데
이 때문에 의전용으로 S클래스를 운전하게 되면 모든 안전 장비를 꺼버리게 됩니다.
최신 기술을 본의 아니게 쓸 수 없는 상황이 오는거죠.
같이 달리는 일행이 있다면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것이 서로간에 도움이 됩니다.
빠른 식별이 가능하고 움직임이 파악되기 때문이죠. 차선 변경 시에는 뒷차가 먼저 자리를 잡아줘야 합니다. 시내 주행시에 신호등에서 앞 차를 놓치게 되면 앞서간 차는 천천히 주행하여 뒤따라오는 차에게 시간을 줘야 합니다. 2대가 주행할 경우에는 첫번째 차가 차선의 오른쪽으로 붙고 뒷차가 왼쪽으로 붙습니다. 그래야 앞차가 뒷차의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더욱이 추월하려고 할 때 뒷 차가 먼저 상위 차로를 차지하기 유리합니다.
이런 상호간의 협조가 없으면 그룹 드라이빙은 엄청나게 힘듭니다.
사실 독일 현지 교포들과 운전을 하면 이런 호흡이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운전병 출신이었던 유학생이라면 조금 더 쉽습니다.
한 번 같이 일했던 이태리 전문 기사분이 있었는데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그와 운전을 했어도 이런 호흡이 맞아서 굉장히 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차를 정차하는 위치도 중요합니다.
뒷좌석 문이 열리면 그 자리에서 일직선으로 현관문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9시 뉴스를 보면 검찰청에 도착하는 검은색 차량만 봐도 그렇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분은 절대 사선으로 입장하지 않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자동으로 잠김상태가 되었던 도어락을 풉니다. 그러면 제 옆자리에 앉은 수행비서가 '다 왔구나'라는 눈치를 챌 수 있죠.

차를 멈추면 저도 따라서 내려야 합니다. 특히나 제 뒷좌석에 누군가가 있을 때에는 물론이구요.
도로변에 차를 정차할 경우에는 뒤에서 오는 차량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는 동작이 좀 급해져서 때로는 기어레버가 P에 있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메르체데스 S클래스는 기어레버가 D나 R에 있을 때 문을 열면 자동으로 차가 멈춥니다.
차 문을 열고 나갔던 운전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는게 악셀 페달을 밟아서 사고가 났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 모든 상황이 끝나고나면 재빠르게 뒷좌석을 확인해서 놓고 내리신 중요한 물건은 없는지
확인 후 유턴을 두 번 해서 차를 돌립니다. 언제든지 내려드렸던 현관문에 도달할 수 있게끔 차를 준비해 놓는 것이죠. 가끔 일행이 많아서 5-6대가 동시에 서 있는 경우에는 서열 순으로 차량을 배치해 놓습니다. 운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신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가끔 도로의 흐름을 방해할 때가 있어서 굉장히 송구스럽습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한모금이라도 마셨던 생수병은 모조리 쏟아버리고 새것으로 바꿔놓습니다.
재떨이도 항상 확인하여 비우도록하고 가능하면 물에 적은 티슈를 재떨이 안에 깔아놓습니다.

끼니는 거르기 십상입니다. 알아서 눈치껏 챙겨먹어야죠.
혹여나 못 먹더라도 뒷좌석에서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물어보시면
'예. 알아서 해결했습니다'라고 대답해야만 합니다. 예의상 물어보시는 인사에
'아니요 아직 못 먹었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 분을 당황스럽게 만드니까요..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됩니다.
기업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은 그 분께서 잠들기 전까지 숙소 앞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4시간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간중간, 낮에 짬을 내어 자는 건 어떻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차에서 세상 모르고 자다가 전화 소리에 놀래서 급하게 차를 대놓으면 비몽사몽이라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는 정신상태가 됩니다.
독일의 호텔은 한국과 달리 로비에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조금 더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어차피 자주 호텔 벨보이와 마주치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는 것이 서로 편합니다. 로비 앞에 손님을 싣고 내리는 공간은 범접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그것이죠. 그들이 한가할 때에는 먼저 다가가서 말도 좀 걸어주고 때로는 사소한 물건이라도 선물이라며 건네줍니다. 그들도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하니까요.. 그러다보니 베를린의 몇몇 호텔의 벨보이와는 지나가며 손 흔들고 인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의전행사 운전, 누구한테 제대로 배운 적도 없지만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생기고
여러 전문 기사님들을 만나고 보게 되면서 몸으로 익힌 부분도 많습니다.
이 직종도 매뉴얼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글로 쓰다보니 생략한 부분도 많습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 유난히 이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햇수로 독일에서만 5년째.. 이제 왠만한 대기업 의전 담당 직원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더라구요.
경력에도 쓸 수 없는 말 그대로 아르바이트이긴 하지만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고 기업마다의 특성도 눈에 보이더군요. 그러다 불현듯.. '아.. 이거 정말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대리급 직원들이 와서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을때
대답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알아차리게 되더군요.. '어느 순간 내가 꾼이 되었구나..'

능숙함이 좋긴 하지만 자꾸만 이 일에 안주하게 됩니다.
제가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이 아니라서 더 그런 것 같구요..
하지만 빠듯한 유학생 생활에 꽤나 큰 금액의 이런 아르바이트는 거절이 안됩니다.
더욱이 언제부턴가 너무 믿어주시는 고용주 분들 덕분에 책임감이 더 늘어서
어떤 때에는 학업을 제치고 이 일을 할 때도 있었거든요..
군대에서의 그 생활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독일에서 몰았던 의전 차량을 떠올려보면
8-9인승 각종 van부터 중형급 세단, BMW 7시리즈 730d부터 760iL까지,
메르체데스 벤츠 S350부터 S500L까지 참 다양하네요.


처음에 S클래스나 7시리즈를 받았을 때는 설명서를 놓고 몇 시간씩 공부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Audi A8나 VW Phaeton도 좋은데 한국 분들이 무조건 벤츠만 고집하셔서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이번에 Audi A8 3.0 TDI가 한 번 있었는데 그 분께서 어찌나 불평하시던지 그 차를 운전했던 친구가 꽤나 고생했습니다만 ㅋ
BMW 7시리즈는 정말 괴물이라는 기억이 너무 강렬합니다.
이런거 저런거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이 S클래스가 의전용으로 최적인 것 같습니다.
연비 면에서는 디젤이 좋지만 정숙성에서는 휘발유 모델이 적합했고, 실내외가 깔끔하고 엘레강스한 디자인이 최적이었죠.
S600이나 S65 AMG는 너무 힘이 넘쳐서 운전했던 독일 기사 친구가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내년 봄까지는 이런 행사 제의가 없을 듯하니 이제는 학업에 매진해야겠네요. 저도 이제는.. 제 일을 갖고 그 일에만 몰두했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2010.09.29 12:34:27 (*.70.18.61)

우리집 마나님과 공주님들도 이런 식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길 바랍니다. 정말 귀한 글이었습니다. 감사~~~
2010.09.29 12:44:27 (*.136.139.33)
군생활 말에 참모 운전병들과 같은 내무반을 쓰며 그들의 고충을 봐왔어서 그런지 공감이 많이 갑니다.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2010.09.29 12:51:19 (*.166.73.97)

아. 인물 사진은 처음보는데 훈남이십니다.^^;
흔치않은 재밌는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합니다. 귀중한 경험이기도 하고...
저도 가끔 회사 기사가 모는 차를 타기도 하는데 천천히 가면 굉장히 답답하던데요.
물론 급할땐 엄청 빨리 잘 운전하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기사분들이 기본은 앞차와의 거리를 과도하게 유지하면서 천천히 운전하시더군요.
나중에 제 전용 기사가 생기면 앞차와의 거리는 촘촘히 누구보다 빠르게를 외치고 싶습니다.^^;;
2010.09.29 14:32:04 (*.76.115.36)
저도 현재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어서 그런지.. 팍팍 와닫네요. ^^;잘 읽고 갑니다. ^^마지막 말에.."저도 이제는.. 제 일을 갖고 그 일에만 몰두했으면 좋겠습니다 ㅠ.ㅠ"취업 준비하며 하고 있어서 그런지 공감이 되네요 ㅠㅠ
2010.09.29 15:08:14 (*.163.251.51)

무슨일이든 익숙해지면 쉽게 벗어나기 힘든 듯 합니다. 그래도 그 일이 목적이 아니라면 돌아설 수 있을때 돌아서야 겠지요.
글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수행기사일은 힘든 일이지만 익숙해진 일이면서 금전적 도움(유혹)도 되는 일이지만 좋아하는 일은 아니라는 느낌이 느껴집니다.
글로서 새로운 경험한 느낌.. 감사합니다.
2010.09.29 15:11:26 (*.133.117.51)

전 서울 의경 출신입니다^^ 군생활을 기동대에서 죽도록 대모만 막다가 운이좋은건지 나쁜건지... 상경을 달고나니...
기동대 경비과장님 무전병으로 끌려갔습니다ㅠㅠ 대모진압을 하러갈땐 과장님,운전병,그리고 저... 이렇게 세명이서 한차에
타고 다녔는데... 운전병이 한번씩 휴가를 하면.. 제가 무전기 4개를 차고도 운전까지 하는일이 한번씩 있었습니다.
운전하랴~무전들으랴... 주차하랴...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나는군요^^
2010.09.29 15:19:35 (*.43.68.202)

어디서도 보기 힘든, 귀한 글이네요.
올린 사진 한장 한장과 글 들에서, 꼼꼼함과 감각이 묻어 나오네요. 혹시, 미술쪽 공부를 하시는지요?
여담입니다만, 상사/대기업/공기업 해외 주재원들(중요 거점 국가/도시 거주)의 업무의 절반 이상이 의전 행사 치르기 및 골프 접대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너무 경직된 사회이고 권위주의 적인 사회이다보니, 이사만 달면 사람들이 권위적으로 변하고, 또 권위적인 대접을 요구하더군요. 자신이 말단일 때, 윗분들에게 해주던 것이 있으니, 후일 자신이 윗 자리에 오르면, 아랫 사람들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게 돌고 돌고 돌고...
빌 게이츠도 해외 출장 갈 때, 본인이 직접 낡은 회사 가방 들고 다니더만. 한국에서는 그 보다 사회적 지위가 훨씬 낮은 사람들에게도, 가방 모찌, 운전 기사 등등 수행원만 여러 명이 제공되기 십상이죠..
객지에서 건강 유의하시고, 학업 제때에 잘 마무리 지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올린 사진 한장 한장과 글 들에서, 꼼꼼함과 감각이 묻어 나오네요. 혹시, 미술쪽 공부를 하시는지요?
여담입니다만, 상사/대기업/공기업 해외 주재원들(중요 거점 국가/도시 거주)의 업무의 절반 이상이 의전 행사 치르기 및 골프 접대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너무 경직된 사회이고 권위주의 적인 사회이다보니, 이사만 달면 사람들이 권위적으로 변하고, 또 권위적인 대접을 요구하더군요. 자신이 말단일 때, 윗분들에게 해주던 것이 있으니, 후일 자신이 윗 자리에 오르면, 아랫 사람들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게 돌고 돌고 돌고...
빌 게이츠도 해외 출장 갈 때, 본인이 직접 낡은 회사 가방 들고 다니더만. 한국에서는 그 보다 사회적 지위가 훨씬 낮은 사람들에게도, 가방 모찌, 운전 기사 등등 수행원만 여러 명이 제공되기 십상이죠..
객지에서 건강 유의하시고, 학업 제때에 잘 마무리 지으시길 바라겠습니다~.^^
2010.09.29 16:13:38 (*.232.6.232)
얌전운전을 즐겨서.. 한 번쯤(아르바이트 정도로) 해보고 싶은 일이기도 한데,
생각보다 조금 더 고된 일이네요.. 덕분에 자동차와 연관된 직업을 하나 더 알게 되었습니다.^^
2010.09.29 16:34:01 (*.17.79.221)

저는 옆에 친한 친구를 태워도 차 움직임 상당히 신경쓰이는데
기업총수급 모시고 다니시면 싱경상당히 쓰이실것 같네요^^;
2010.09.29 17:11:55 (*.23.144.32)

아주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뒷좌석의 VIP든, 운전석의 기사든, 어느쪽이라도 저로서는 쉽게 접할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로군요.
2010.09.29 18:13:29 (*.229.207.162)

저도 미국에서 오는 VIP 담당 운전을 종종 했었는데 (카투사 운전병) 일 시작하기 1주일전부터 스케줄외우고 인스트럭션 북 받고 난리 치던 기억이 나네요-. 군인인지라 하나 더 추가되는게 있었죠. VIP 오는 날은 머리를 buzzcut으로 밀어버린다..ㅎ 일단 운행을 시작한 후에는 무조건 과묵한게 최선이었던듯 합니다. 굉장히 생소한 주제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2010.09.29 18:19:06 (*.202.141.46)

어떤분야든지 깊이들어가면 점점 힘들어지고 남들이 생각해보지도 못한 부분들까지 신경써야 하는것들은 역시 똑같은가 봅니다. 열심히 하시다보니 어느덧 프로가 되셨군요....재미있게 잘봤습니다. ^^;
2010.09.29 19:24:53 (*.229.115.24)

아..의전운전의 애환이 진하게 녹아있는 글이네요. ㅋㅋ
예전에 승진님 포스팅에, 500 스티어링을 잡은손이 참 정갈하다..했는데, 기본기가 확실한 이유가 있었군요. 위에 슈트 소매깃 나온 사진도 멋집니다. 나중에 장인장모 모시면 한방에 사랑받겠어요. ^^
2010.09.29 22:18:40 (*.247.91.232)

저도 1호차 운전병은 아니지만 파병경험 때문인지 ADEX란 행사에 VIP운전병으로 뽑혀서 1주일동안 다녓는데
참 긴장되더군요 ㅡㅋㅋ 꽉 막힌 서울 한복판을 다닌다는게 경험 부족한 저에게는 참...ㅋㅋ 그래도 사고 없이
무사히 임무를 마쳤죠 전역하고 기사직 알바를 해볼까 햇엇는데 제가 생각한 거 이상으로 훨씬 힘들어보이네요 ㅎ 좋은 글 잘 읽엇습니다
2010.09.29 22:29:10 (*.141.147.228)

너무 잼있게 잘 봤습니다^^
저도 운전면허 따자마자, 엄하신 아버님을 뒤에 모시고 운전을 배워서
많은 부분이 참 와닿네요~.~
부드러운 악셀링 & 브레이킹은 기사님(?)의 기본 스킬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