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간 고민 끝에 중고차를 하나 입양했습니다.


인증샷은 추후로 미루고 구입한 차를 소개하자면...

자그마치 1997년식 기아 크레도스 1.8 GX Di 수동입니다.


사진1-1.jpg


생전에 가장 싫어하는 장르인 국산 중형 세단을 사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예산이 빈약한 상태에서 고를 수 있는 차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어쨌든 차 살 때마다 공장에서 갓 뽑은 새 차만 고집했던 사람이

난생 처음 중고차를 사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답답하긴 해도,

이동수단은 필요하기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접고 예산과 환경에 맞는 차를 찾아야 했습니다.


거의 혼자 타고 다닐 차라 작은 차라도 상관은 없었지만,

어쩌다 와이프와 애 태울 일도 분명 생길테니 가급적 뒷좌석은 넓은 차를 골라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삶의 무료함을 새삼 느끼고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여기저기 다닐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래도 기왕이면 장거리 달려도 덜 피곤한 차가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다만 변속기는 무조건 수동이어야 했습니다.

차를 모는 느낌이 절대적으로 뛰어나기도 하지만,

그간의 경험을 보면 오래된 차에 자동변속기 상태가 괜찮은 놈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경제성 면에서도 불리하고 만약의 상황에서 수리비 부담도 적지 않습니다.

최소한 수동변속기 차라면 웬만큼 나이가 들었다 하더라도 운전연습용 으로 막 굴렸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필부필부가 선호하는 중형급 차라면 더 그렇죠.


네바퀴굴림 SUV가 무척 끌리고 있는 시점이지만,

그건 와이프 차인 기아 쏘울의 할부가 끝나면 중고 SUV를 사라고 꼬시면 대충 해결될 일입니다.

와이프는 워낙에 큰 차를 좋아하니 충분히 설득 가능하리라 봅니다.


비교적 싼 값에 매물이 나왔길래 직접 매장에 가서 확인했더니 껍데기는 정말 안습인 상태였습니다.

도어 패널도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었죠.

동반석 뒤 도어 아래쪽은 찌그러진 후 야매로 도색한 듯 아래쪽 에서 녹이 올라와 있는 상태.

앞 펜더도 양쪽이 모두 찌그러져 있고, 뒤 펜더도 슬쩍 들어가 있습니다.

다행히 앞 펜더를 빼면 어느 쪽이든 큰 충격을 먹고 심하게 꺾이거나 접힌 부분은 없습니다.

경첩 상태를 보아하니 지저분하긴 하지만 교체한 흔적도 없습니다.


사진2-1.jpg


하지만 가장 크게 고려한 부분은 파워트레인이 멀쩡한가,

그리고 서스펜션이 웬만큼 살아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차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의 상태가 괜찮다면 당장 큰 돈 들여 수리할 일은 적기 때문입니다.


시동을 걸어보니 16만 km에 가까운 거리를 달렸는데도

일발시동에 공회전도 비교적 안정적이고 부조의 느낌도 찾기 힘듭니다.

미미가 맛이 가는 단계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엔진 자체의 진동도 예상 외로 적은 편입니다.

나름 배터리도 쌩쌩한 상태인데다 의외로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것도 차에 대한 느낌을 좋게 합니다.


거의 기본형에 가까운 모델이다보니 실내는 아주 간단합니다.

중형차에 흔하디 흔한 우드 그레인이 없는 것도 오히려 제게는 반갑습니다.

카세트/라디오 데크에 이퀄라이저가 붙은 순정 2단 오디오는 무려 알파인제.

이퀄라이저는 기능이 정상이지만 디스플레이가 나가서 조작은 무리입니다.


여기저기 살펴보면 서스 쪽에 영향을 미칠 대형 사고의 흔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차를 몰아보니 서스가 약간 주저앉은 느낌이고 요철에서 뒤 서스쪽에 덜걱거리는 소리가 나지만

일상 주행에 무리 없을 정도이고 전반적인 주행감각은 괜찮은 편입니다.

클러치도 조금 늘어지는 느낌은 있지만 1~2만 km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3-1.jpg


업자가 매입한 후 화원을 운영하는 친척이 화분 운반용으로 썼다고 하는데

실제로 실내를 들여다 보면 직물 시트가 온통 얼룩 투성이입니다.

중고차 특유의 오묘한 냄새에 화분에 담겼던 비료때문인 듯 역하지는 않아도 불쾌한 냄새가 나고

에어컨도 청소가 필요할 정도의 냄새가 납니다.

그 정도는 적당히 청소하면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 정도면 웬만큼 탈만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섀시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심하게 찌그러진 양쪽 앞 펜더만 판금도색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등록비와 세금, 매매수수료를 포함해 12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차를 인수한 것이 지난 금요일 저녁.

업자가 해 온 펜더의 판금도색은 야매에 가까운 엄한 수준이지만

최소한 멀리서 보아 흉해 보이지는 않을 정도이니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인수한 후 좀 더 차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시운전 때 느낄 수 없었던

흠들이 발견되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수긍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부분적으로 깨진 헤드램프는 폐차장에서 부품 구해다 갈면 되고, 지저분한 실내는 청소하면 됩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인 엔진은 일단 오일부터 갈아 보고,

상태를 봐서 플러싱 정도에 흡기계 청소, 플러그 및 플러그 배선 교체,

타이밍 및 에어컨 벨트 교환 정도면 웬만큼 제 성능을 발휘할 것 같습니다.

과거 크레도스에서 느낄 수 있었던 핸들링 감각이 아주 녹슬기 않았기에,

힘들지만 고집스러웠던 옛 기아의 차 만들기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따지고 보면 거의 3년 전 어머니가 차를 바꾸기 전에 타셨던 1996년식 기아 세피아 LS도 비슷한 느낌이었죠.

24만 km를 넘겨 팔 때까지 그 단순했던 차는 큰 트러블 하나 없었습니다.


어차피 오래 탈 생각으로 구입한 차는 아닙니다.

짧으면 반 년, 길어도 1년 내에는 최소 2년 이상 탈 수 있는 다른 차로

교체할 것을 염두에 두고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 몰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이상의 돈도 들이지 않을 계획입니다.


정비업소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기계적 정비도 최소한으로 하고,

웬만한 정비는 집에서 셀프로 할 생각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저분한 실내도 집에서 셀프 크리닝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쨌든 차와 부대끼면서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와이프가 처형네에서 얻어오기로 한 스팀 청소기가 도움이 되겠죠.


오늘 아침으로 이달의 바쁜 원고 마감은 대충 정리가 됐습니다.

물론 회사 일로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겠지만 열흘 남짓 짬짬이 차와 씨름할 수 있는 시간은 있습니다.

왠지 이 놈에게 정이 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