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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외의 일들이 항상 생길 거라는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찔끔찔끔 쓰다가 모처럼 또 타고 온 김에 후다닥 나머지를 써 봅니다.
오늘의 글감은 카마로 SS. 그리고, 언제나처럼 상상 속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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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07:00>
W의 아침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기상 후에는 정온의 물 한 컵, 그리고 간단한 스트레칭.
샤워 전 한여름이면 냉차, 이따금 전날 업무의 피곤이 가시지 않은 날이면 에스프레소.
현장 방문이 많으면 자켓, 미팅이 있으면 정장. 여름이라도 반팔은 외출복이 아니라는 고루한 생각.
현관을 열기 전 트레이 위의 차 열쇠를 고를 때에도 나름의 기준에 따라 움직인다.
대부분의 출퇴근은 컴팩트한 씨티 카, 악천후에는 대형 SUV, 이따금 개성을 드러내야 할 때에는 클래식한 세단.
그리고 이따금씩, 한 달에 두어 번 정도에는, 논리적인 사고로 비논리적인 결정을 내리며, 업무 보다는 퇴근 후의 밤을 기대하며
- 머슬카.
<AM 08:00>
지하주차장 저 안쪽에 주차해둔 차를 향해 걸어갈수록 설레이는 마음이 입꼬리로 배어 나온다. 어렴풋이 보이는 후드 라인은 주변의 차량들의 그것에 비해 크게 낮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가며 점차 드러날 수록 보이는 낮은 루프라인과 큼지막한 휠은 마치 고향의 그래픽 노블에나 나올 법한 과장된 그림체를 연상케 한다.
이 기분을 쭉 유지하기 위해서는 난쟁이 구두주걱처럼 생긴 카마로의, 아니 GM의 키를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아야 한다.GM의 부품 공용화는 미칠듯한 가성비를 오너에게 선사하고, 그만큼의 특별함을 빼앗아 갔다.
계기판의 끄트머리와 천장까지 한 뼘. 어깨 옆으로 넉넉히 올라와 있는 벨트라인... 슬쩍 보이는 본넷의 파워 돔 이상의 시야를 위해 시트를 올리려 해 보지만 이내 천장에 머리가 닿아 버리기에 180cm 이상의 사람은 방석을 위로 올리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 미국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줄어든 것인지? 아니면 디자이너가 인체공학자를 이긴 것인지?
차에 타 손에 만져지는 부품들의 저렴한 플라스틱 느낌에 매력을 찾아볼 수가 없다. 독특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의 온도 조절 다이얼마저도 정작 만져보면 내부 부품이 과연 몇 센트나 될까 싶을 정도로 저렴한 느낌에 불과하고.... 이전에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비슷한 배기량의 독일제 6.2L 차량의 키에 그리움이 커져간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스타트 버튼을 누르며 스타터 모터가 거칠게 돌기 전까지는.
지금껏 다양한 8기통들의 키를 주머니에 넣으며 음량에 놀랄 지언정 음색을 낯설게 느낀 적은 없었다.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굵은 비트를 곧바로 뿜어주는 삼각별의 8기통
타격음보다는 매끄러운 회전에 악센트를 살린 '기술을 통한 진보' 계열의 8기통
낮은 압축비를 보여주듯 게으른 회전수와 거친 숨을 토해내는 미제 트럭들의 8기통
생물과 같이 숨을 한번 고르고 나서 바닥에 깔리는 포세이돈의 8기통...
엔진의 태생을 고려하였을 때 트럭과 흡사하겠다 생각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동과 함께 앙칼진 고음으로 건조한 음색을 뿜어낸다. 요즘 시대에 푸시로드 V8을 유지한다는 애틋함은 이내 최신 스몰블럭에 들어가 있는 신기술들의 정보로 빠르게 풍화된다. 폭발음 이후 모노톤으로 뻗어주는 냉간시동은 생물이나 악기보다는 오히려 로봇 혹은 기계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건맨에게 일기토를 신청하는 '라스트 사무라이'가 칼집에서 빼어든 검이 라이트세이버라면 이런 느낌일까.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낼까 싶은 허접한 느낌의 기어봉을 끌어내리며 다시금 마음 속으로 소중한 격언을 되새긴다.
"칼자루 쥔다고 칼 휘두르는거 아니다. 매사에 겸손해라..."
....
<PM09:00>.
업무를 밀어내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은 지났고, 도로를 채우던 빛의 연속적인 선들도 이내 점으로 바뀌어 있기 마련이다. 노트북을 덮고 캘린더의 일정을 다시금 머리에 집어넣는 도중 친한 동생에게 연락이 온다. 카마로를 사기 전부터 이미 함께 달리기용 차의 색과 카테고리를 맞추자 약속할 정도의 친구이다.
"오늘 바쁘십니까"
"오늘 괜찮지. 안 그래도 타고 나왔어"
"저도 곧 출발하겠습니다,, 오늘은 슬드? 빡드?"
"빡드"(빡센 드라이브)
"(한숨) 아 진짜..."
"y 안 찍을게 안 찍을게"
"이따 봐요. 파스쿠찌 앞"
외투를 입으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해가 쨍쨍하게 떠 있을 때의 주행들 - 그저 가속 페달에 발을 슬쩍씩 올려놓고 최대한 드러나지 않는, 피해주지 않는 - 은 배기가스로 바뀐 옛 조상들에게 미안할 정도의 절제심의 표현이었다.
이제는 더이상 아니지, 오늘의 내 행복은 성취감/달성감보다 좀 더 저급하고 말초적인 것에 맡길 것이니깐.
밤이 어울리는 차가 있다.
<PM10:30>
두 대의 검정 차가 순환도로를 달린다. 깜빡이는 필수, 타이어 예열 전 급가속 자제. 터널이 비어 있지 않는 이상 고rpm 자제. 선두차량 신호 전 추월 금지...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얌전히 흐름을 타고 있으면서도 추월선을 차지하는 차량들의 양보가 점차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안 그래도 한산했던 도로의 차선이 넓어지고, 눈 앞의 빨간 불빛들이 줄어드는 만큼 언뜻언뜻 들리는 선두 차량의 비트 섞인 배기음이 들리는 빈도가 늘어난다. 왼 손으로 핸들을, 오른 손으로 기어봉을 잡고 슬렁슬렁 운전하다가 자연스레 기어봉을 왼쪽으로 밀어넣고 두 손을 핸들에 올려놓는다.
터널 속에서 트럼펫처럼 울리던 앞 차량의 배기음 이후, 1차선 양보.
비상깜빡이 다섯 번. 즉, 다음 체크포인트까지 자유주행.
3단, 4000rpm, 걷어차이는 가속 페달.
경망스럽게 흔들리는 차의 꽁무니를 찍어누르겠다는 마음으로 페달에 실은 무게를 줄이지 않는다. 오직 오른쪽 패들을 위해서 뻗은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링 위로 올라간 마음으로 단단하게 핸들을 잡아야 날뛰는 앞코를 원하는 방향으로 둘 수 있다.
차의 거동이 온순해질때쯤 왼 바늘이 6을 넘어가고, 시프트 업. 이를 반복.
둔탁하게 시트로 전해지는 변속 충격. 이미 규정 속도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는 속도.
파워밴드에 거의 맞아 떨어지는 변속은 평소에 투덜댔던 다단화에 대해 조금의 면죄부를 준다.
나를 가드레일로 쳐박으려던 엔진은 속도가 올라가면서부터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을 외치며 돌고,
코너에서 범프를 지나칠 때마다 서스펜션은 내 멱살을 잡으며 아직 갈 때가 아니라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친다.
불만스러웠던 좁아터진 앞유리창은 이 속도대에서는 오히려 집중을 도와주고 있고,
내 역할은 그저 차선을 최대한 밟지 않으면서 오른발과 핸들을 유기적으로 조절할 뿐...
몇 개의 코너를 지나 도로 왼쪽에 첫 번째 노란 표지판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면 이제 악셀에서 발을 풀 때이다.
자연스레 감속하며 온도 게이지들을 엄지로 이리저리 넘겨봐도 차는 지친 기색이 없다.
차를 세우고 구수한 브레이크 패드의 냄새와 차 아래편의 장작 타는 배기 소리를 듣다 보니 일행이 들어온다.
"아 진짜 형 왜그래요 y 안 간다면서"
"미안 까먹었어"
"그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나 진짜 드라이브샤프트만 바꾸고 나면 봐요"
"......."
<다음날, AM08:00>
오늘은 시내 위주의 일정이니 1.5L의 직렬 4기통을 깨워 본다.
칼럼시프트를 당겨 내리며 악셀에 발을 올리고.
오늘 하루도 겸손하고 희망차게! 마음 속으로 외치며 핸들을 꺾지만
지하주차장 구석에 웅크려 있는 내 검정 8기통을 백미러를 통해 애써 찾아보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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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다 보니 차량 후기 없는 그냥 폭주 픽션(?)이 되어버렸습니다만.... 그래도 뭐. 회원님들은 개떡같이 적어도 찰떡같이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
다음 글은 시내용 뽈뽈이 이야기가 될 예정입니다.